[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봄날, 들판이나 산허리쯤에 하얗게 피어나는 찔레꽃은 그 곱고 순박함에 가슴이 툭!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화사한 장미가 성모님을 상징하는 꽃이지만, 내게 다가오는 성모님은 장미보다 찔레꽃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봄날 산행 중에 무심히 계곡물에 하얀 꽃잎이 흘러가거나, 흐르다 저들끼리 뭉쳐있는 걸 보면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들어선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나약함에...순결한 아름다움이 덧없이 스러지는 시공간이 바로 여기였음에...

초등학교 시절, 누구든 한번쯤 교실에서 오줌을 싸고 사면초가에 갇혀 쩔쩔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부여의 시골 면 소재지에 위치한 학교를 다녔던 우리들에게, 고학년이 되도록 오줌싸기를 반복하던 안타까운 친구가 있었다. 이름도 어여쁜 "혜숙이"가 그랬다. 대개 3학년 정도 올라서면 오줌싸기를 그치건만, 혜숙이는 고학년에 이르러서도 종종 오줌을 싸서 동창생들 머릿속에 "오줌싸개"로 영영 각인이 되어버렸다.

교실 바닥에 오줌을 싸놓고 가버린 날이면, 그녀는 으레히 며칠씩 결석을 하곤 했다.

그리고 기억이 지워질만한 시간이 흐른 후, 젊고 예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시 등교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손에는 각종 학교 비품이 들려있었다. 주전자와 컵, 어느 날은 선생님 책상 넓이에 맞는 테이블보를 가져오거나.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리듬이 깨져버렸다.

보통, 2,3일 후면 으례히 동생을 업은 어머니 손을 잡고, 뭔가 교실에 소용이 될 듯한 물건을 사들고 나타나야 하건만,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은 왜 내게 혜숙이 집에 가보라고 하셨는지 모르겠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어서 학교에 나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蓮花里-친구가 살던 동네는 연꽃이 피어있을 법한데 연꽃은 보이지 않고, 유난히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공동묘지가 가까운 동네이기도 해서 무서웠지만, 하얀 꽃무더기를 찾아다니며 찔레순을 까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님 말씀을 전했는지도 분명치 않고, 다만 친구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날이 저물도록 놀다왔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러나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반대로 전했는지, 혜숙이는 그 후 다시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래 전, 할렐루야 기도원을 취재하여 방송하는 걸 보았던 기억이 있다. 아는 친구집이 평창동 기도원 근처여서 친구와 함께 그 곳의 생수를 뜨러 드나들어 보기도 했고,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구름떼처럼 모여들까 싶어 기도모임에 참석해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기암 환자거나, 병이 들었으되 병원에 갈 처지가 못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검찰총장 부인이 기도원장의 드레스를 맞춰주는 일도 있었지만. 성경 속의 무리들이 현세로 환생한듯, 세상을 여러 번 바꾸어 살아도 그 병에서 놓여나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와 안타까웠다. 우선, 기도원 입구에 들어서면 살이 썩는 냄새가 풍겨온다. 이어서 드러나는 풍경은 전쟁터 야전병원을 떠올리도록 처참했다. 어서 그 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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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충남방직을 다녔던 다른 동창생이 그 공장 식당에서 "혜숙이"를 만났다고 한다. 무심결(?)에 "어 오줌싸개!"하며 반기던 동창생에게 "혜숙이"는 자신은 오줌싸개 그 혜숙이가 아니라며 사람을 잘못 봤다고 외면하며, 식판을 들고 가버리더라고 전해주었다. ... 다시 시간이 흘러, 천호동시장에서 나는 혜숙이와 조우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갓난아기를 업고 시장을 보는 그녀와 다시 만난 것이다.

호리호리하고 둥그런 눈을 가진 혜숙이는, 초등학교 시절 그녀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갑자기 찔레꽃잎이 계곡물에 흘러가는 영상과 오버랩되는 그녀의 화사한 모습은 오줌싸개와는 연결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침 집에 잡채를 해놓았으니, 가서 같이 먹자는 말에 끌려, 우리는 장보던 일도 마치지 않은 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방 두 개를 얻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들보다 한참이나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의 남편과 인사를 나누기가 어색했었다. 남편은 지리산으로 산기도를 떠난다며 바로 집을 비워 나는 혜숙이 남편의 법당을 둘러보았다. 그 당시 천호동성당에서 청년회활동을 하던 내 눈에, 법당의 모습은 지나치게 원색으로 도색되었다는 거부감이 일면서 옛친구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이것저것 잔뜩 싸주어 시장본 물건보다 더 많은 짐을 들고 대문을 나서며 "ooo운명철학관"의 간판을 보며 사랑하는 친구를 저승에 두고, 나만 이승으로 빠져나온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 스트레스가 심하게 몰려오면 혀가 마비가 된다. 발음이 줄줄 새버리고 한 문장을 완성하기가 어려워진다. 언제부터 이런 현상이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평소, 말이 너무 많아서, 문장에 윤기가 흘러서 걱정이다가 이런 지경에 빠지면, 그만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아마, 생의 어느 지점에선가 내가 짐질 수 없는 부담감을 갖게 되면서 겪기 시작한 경련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곁에서 멀어지며 고통을 겪다보면, 내 영혼은 홀연히 사이비 집단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 곁으로 날아간다. 그 치료의 허황함조차 깊은 연민으로 다가오며 적어도 그들은 현실교회 사람들이 보여주는 단단한 벽은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골똘히 그들의 비현실적 스타일에 나의 현실이 접목되어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혜숙이를 찾게 된다.

혜숙이, 나 그리고 이단으로 지목된 기도원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달리 말할 것 없이 迷信에 빠져있다.

그러나 열 두 해 동안, 하혈을 하며 소외와 결핍감에 시달리다 보면, 예수님 제자의 옷자락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명동성당 옆문에 놓여진 성수를 바가지로 머리에 붓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어느 신부님은 그녀를 지목하며 제단에서 "미친 년"으로 표현하셨다. 지인 중에,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사리조각을 가지고 계시다. 사방 3센티미터의 작은 옷조각을 놓고 그녀는 기도를 드린다. “,,,낫게 하여 주소서!” 그녀 또한 迷信의 미로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아프리카에서 사목하시는 수녀님들의 의약품, 식료품 요청이 실린 글을 읽으면서도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는 내가 싫어진다. 그 곳의 아기들이 머릿수건 하나만 있으면 낮밤의 기온차이에서 오는 한기를 극복하여 생존할 수 있다며, 모자를 요청하는 글에도 나는 묵묵부답한다. 어느 추기경님이 베드로성당에 있는 미술품들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제안 역시 실행되지 못하는 듯하다.

모두가 迷信에 빠져들었다는 기분이 든다.

현실교회의 화려한 몸체와 그들의 견고한 닫힌 문이 서러워 사이비가 생기고 이단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이비와 실재는 서로를 자극하며 진실을 획득해 갈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 누구나 迷信의 길을 걸으며 이 세상을 헤매다 진정한 신앙에 이를 것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요단강 입구에서조차, 빛의 천사를 가장한 검은 천사의 미혹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진정한 신앙의 正道에 들어서기가 어렵다는 비유일 것이다.

해프닝 -그 심정은 동감한다. 오빠의 이른 죽음으로, 어린 두 남자 조카들과 살아오면서 나는 그들이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홍콩영화에 나오는 행동을 여러 번 해보았다. 다짐하는 반성문을 써서 태워 물에 타서 같이 마시기도 하고^^. 육화의 신비도 비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허무맹랑한 교리이다.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이다 싶도록 거룩한 삶을 살아내셨기에 외교인들조차 무릎을 꿇는 거 아닐까.- 으로 위신을 추락시키며, 제도교회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사이비 집단 사람들의 진정성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예수님이 가진 것 없이 사셨듯 최소한 재산을 불리지는 말아야한다. 제도교회의 설움을 받고 뒤쳐나가(?) 이룬 것이, 겨우 제도교회의 표절이라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작은 경험이지만, 나는 내가 속한 교회 게시판에 성극포스터를 붙이고 질타를 들었다.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교회 사무실의 허락을 받았고, 엄연히 지도신부님이 계시는 공연으로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의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반면에, 고위 사목위원의 자제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신부님이 제단에서 홍보하는 일도 있었다. 말단의 지엽적인 에피소드라 말하기 부끄럽지만, 지상교회는 인간영혼의 구원이라는 심원한 주제보다, 친목도모라는 현세적인 사교에 더 몰두하는 迷信에 홀린듯하다.

비난의 대상이 된 기도원에는 누구든 언제든 찾아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서울 어느 성당 어느 사제관에 들어가, 병들어 버려진 사람이 편안히 먹고 잘 수 있을 것인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 경찰에 연행되기 십상일 것이다.

...지상의 교회는 여의주를 두 개 물고 승천하려는 이무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 욕심의 무게에 짓눌려, 교회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게 아닐까.

나주의 성모동산, 할렐루야기도원, 초등학교 친구 혜숙이와 내가 지향하는 신앙은 덜 떨어진 사람들이 보이는 어리숙한 행동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 합리적 지성을 가진 미디어 매체가 분석틀을 들이밀면 그 허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들의 신앙이 요지부동인 채로 남는다는 게 현실교회의 깊은 고민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제도교회가 바르게 기틀이 잡힌다 해도 여전할 것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지닌, 더 높은 차원에의 향수는 규범화된 제도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교회)문화와 문명은 인간의 부속물일뿐이다. 설화 속에 등장하는 여우들이 한결 같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건, 여하한 생명체든 자신들의 정체성을 넘어 초월하고자 하는 지향이 있기에 그러할 것이라고 본다. 이들 사이비(?) 집단들은 합리적 지성이 드러내는 합리의 틈새, 생의 비의-아직 합리의 틀에 맞춰 해석되지 못한-에 터전을 잡고 있는 측면도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외부에서 들어가 취재라는 도구를 통해 얻은 지식과, 내부집단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들 또한 놓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 종교집단이 기존 제도에도 못 미치는 인식능력으로 인한, 해프닝 성격도 농후하기에 그를 바라보는 심정이 스산하다.

이미 규범화한 문화의 틀은 그 문화를 생산해 낸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을 뿐,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문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많은 우려를 담은 장외집단의 사람들은 그들이 선 땅이 협소하기에, 더욱 하느님의 지혜로 무장되어야 할 것이다. 장사익의 노랫말처럼, "순박한 꽃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그 꽃잎 같은 사람들이 사려깊은 이들의 인도로 충만한 삶을 누리길 빌어본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가믈리엘 선생이 토했던 말씀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혀준다.

"...사실 이 의도나 이 일이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여러분이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은 스스로 하느님의 적대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규원 200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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