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 공돌이가 우리신학을 하게 된 내력(4)

▲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는 가톨릭평신도 청년들이 교회쇄신을 위해 신학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루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이 책에선 1980년대와 90년대의 천주교사회운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교회론과 교회사 연구 성과를 담았다.(사진/한상봉)

1987년 가을, 한국 정의평화위원회는 처음으로 천주교사회운동 종사자 연수를 열었다. 연수 프로그램 가운데 활동 영역별 만남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전국 각 교구에서 청년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처음 만났다. 서울, 인천, 안동, 부산, 청주, 광주 등에서 모인 우리는 금세 의기투합했고, 그 뒤 격월로 전국 각 교구를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고 경험과 자료를 나누었다. 1년 넘게 비공식으로 만나던 우리는 1989년 2월 전국가톨릭청년단체협의회(전가청협)를 결성했다. 나는 천주교인천교구청년회 회장 자격으로 대표자회의에 참석했고, 나중에 정책실장을 맡았다가 의장도 맡았다.

각자 활동이 많고 교통편이 좋지 않았던 때라 밤늦게 열두 시가 돼야 모두 모이곤 했다. 새벽 두세 시까지 회의하고, 끝나면 소주 한 잔 마시면서 뒤풀이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자기 교구로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부산에 회의하러 네 번째쯤 가서야 바닷가 구경도 하고 회도 먹는 호사를 누렸다. 1990년 6월에는 9일에 인천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다음날인 10일이 내 결혼식이었기 때문이다. 새 신랑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두세 시까지 하는 회의에 나도 참석해야 했고, 회의 뒤에도 붙잡는 바람에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 잠깐 눈 붙이고 결혼식 준비를 해야 했다. 이리 정이 들었으니 지금도 만나면 더없이 정겨운 동무들이고 동지들이다.

그 무렵 가톨릭청년단체들은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 다양한 강좌를 열었는데, 본당이나 지역은 유명 강사를 모실 형편이 되지 않아 어줍지 않은 나도 강사로 초대될 때가 많았다. 주로 역사의 예수, 가톨릭청년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강의였다. 강의 준비를 하느라 한국신학연구소 계간지 <신학사상>과 여러 신학 책들을 꾸준히 봤다. 내 것으로 소화해서 강의해야 하니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신학 이론과 그렇지 않은 것을 뚜렷이 구분하면서 공부하였다.

1988년 '공동체 지향'이 주안1동 본당으로 사무실을 옮겼을 때, 주임사제였던 김병상 신부는 우리에게 본당 25년사 일을 맡겼다.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큰 배려를 해주신 셈이다.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역사 기록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무엇보다 본당사목의 1차 자료들을 직접 보고 정리하면서 이른바 사례연구, 현장연구를 한 셈이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 뒤로도 용현동, 부평4동, 주안3동 본당 등 꽤 많은 본당사를 집필했는데, 수입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사목 현장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감각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야 사목신학이라는 신학 분야가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내 주된 관심 영역이 사목신학으로 되었던 모양이다.

1989년 2월, 공동체 지향이 대중적 신학연구자모임으로 활동 방향을 바꾸면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창립한 '가톨릭민중교육연구회'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모임의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새로 만든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상근연구원으로 가고, 또 예수회 입회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무책임한 결정들 때문에 많이 속상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가톨릭민중교육연구회의 가장 큰 성과는 성서대학이었다. 구약과 신약을 몇 개 주제로 나누어 강좌를 진행했는데, 수강생을 대상으로 소모임을 구성하였다. 이 소모임이 나중에 ‘실천하는 성서공동체 청년예수’가 되었다.

사실상 실패한 인천 가톨릭민중교육연구회와 서울 가톨릭신앙운동연구회 활동을 평가하면서 전문적 평신도 신학운동, 그러니까 신학으로 밥 먹고 살 생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는 데 공감대를 이루었다. 1987년 6월민주화운동 뒤에 진보학술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사회운동 분위기도 우리가 이 같은 생각을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박준영, 한상봉, 강인철, 이성훈, 이대훈 등과 함께 1990년 2월에 만든 모임이 가톨릭청년신학동지회(신동)였고, 좀 뒤에 박현준, 박문수도 참여하였다. 그때 강인철은 군 복무 중이었는데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신동은 월례 발표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진보 학술운동이 운동 이론을 제공하듯이, 신동은 천주교사회운동의 이론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처음 발표회는 운동 이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문 연구자를 지향하는 모임이었으니, 엄격한 분위기에서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연구 결과가 우리 현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졌고, 현실에 큰 의미가 없는 연구는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

신동 월례 발표회는 대학원을 다니지 않은 나에게는 훌륭한 단련의 장이었다. 우리는 제1기 월례발표회 성과를 묶어 1991년 7월, 무크지 <변혁시대의 교회>를 발간하였다. <변혁시대의 교회>는 가톨릭청년학생운동에 나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제주교구 신강협 후배는 이 책을 보고 신동의 존재를 알았다고 하고, 나중에 스스로 우리신학연구소에 찾아와 평신도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기 월례발표회가 천주교사회운동 이론에 집중되었다면, 1992년에 진행된 제2기 월례발표회의 큰 주제는 공동체운동이었다. 가톨릭청년학생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줄곧 우리 운동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고, 천주교사회운동은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를 함께 이루어나가는 공동체운동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신동은 우리나라 공동체운동의 역사, 대륙별 공동체운동 연구 등을 통해 우리 현실에 맞는 공동체운동론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공동체운동을 주된 연구 주제로 삼게 되었다.

성서대학의 소모임에서 출발한 ‘실천하는 성서공동체 청년예수’도 이 같은 흐름에서 진행되었던 청년공동체운동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1980년대 말 서울에는 정치 성향과 운동 노선에 따라 가톨릭민주청년공동체(가민청), 애국크리스찬청년연합(애청) 등 다양한 청년 조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 떨어져 나와 성서와 운동을 통합하려고 했던 모임인 ‘우리신앙공동체’였다.

청년예수와 우리신앙공동체는 공동으로 청년성서교재 <우리들의 성서>를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청년성서공동체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 구심이 될 연구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1990년 말 우리신학연구실을 창립하였고, 그 사무실은 막 지어진 부평4동본당(주임사제 조성교) 교육관에 두었다. 1990년에 우리신학연구소 설립의 중심이 된 신동과 우리신학연구실이 모두 설립되었으니, 돌이켜보니 1990년은 평신도 신학운동에서 분수령이 된 해였다. (계속)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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