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가부장주의 비판.. '아버지' 하느님을 넘어서려 애써

 

▲ 메리델리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지난 1월 3일 1세대 여성주의 신학자 메리 델리(Mary Daly)가 사망했다. 그녀 나이 81세였으며, "급진적인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라고 스스로 여기던 메리 델리는 1960년대부터 줄곧 신학을 강의해 왔던 예수회의 보스턴 대학과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 신자였던 미국 여성신학자 메리 델리는 처음부터 전통적 신앙에 도전해 왔다. 그녀는 <교회와 제2의 성>(The Church and the Second Sex, Harper & Row출판사)을 출간한 1968년부터 세상의 주목을 받아왔는데, 그녀는 가톨릭교회 안에는 여러 세기동안 제도적으로 억압당하던 여성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밖에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 여성해방의 철학에 대해>(Beyond God the Father: Toward a Philosophy of Women’s Liberation”,(Beacon, 1973)라는 책을 썼는데, 종교 안에 깃든 여성혐오증을 탐구했다.  

델리는 가부장적 전통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고 동사로서의 하느님에 근거한 여성학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남성으로 상징된 하느님 개념은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 시키며 가부장적 문화를 강화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하느님은 굳어진 "명사로서의 하느님"이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을 "존재의 힘들"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했다. 하느님은 여성에게 존재의 힘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인 "동사로서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메리 델리는 항상 비주류적인 학문적 종교적 삶을 살았는데,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스스로 '후기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제도종교를 변함없는 가부장적 구조라고 비판했다. 그녀의 학문적 관심은 주로 신학이었지만, 점차 영성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왔다. 

메리 델리는 뉴욕주 동부 스케넥터디에서 1928년 10월 16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자연의 세계는 그녀와 공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14살 쯤 되었던 어느 여름 날, 클로버 꽃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참 놀랐다." 그녀는 1996년 <더 뉴요커>에 이렇게 글을 썼다. "꽃이 정말 단순하게 말했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1950년에 세인트 로즈 대학에서 영어와 라틴어로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노트르담에 있는 성 마리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스위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학위를 더 취득했다. 

1966년부터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으나, 1969년에 출간한 <교회와 제2의 성>이 적극적인 호응을 받자, 학교당국으로부터 교수직을 거절당했으나, 1,500명 이상의 학생이 탄원서를 내서 다시 교수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1999년 메리 델리가 보스턴 대학을 그만 두었을 때, 학교 당국은 그녀가 은퇴에 동의했다고 발표했으나 델리 자신은 은퇴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비평가들은 메리 델리에 대해 칭찬과 비난을 거듭했다. 그녀가 가부장적 교회를 불꽃이 일 것같이, 신랄한 풍자로, 예상치 못한 방법 드러내며 구둣점을 찍으며 비판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Websters’ First New Intergalactic Wickedary of the English Language> (Beacon, 1987; with Jane Caputi)에 매혹 당했다. 성차별을 넘어서는 이 영어 사전은 “Mister-ectomy” (피임문제에 대한 해석)와 같은 신조어를 실었으며, 여성을 폄하하는 “crone”(쪼그랑 할멈),“hag"(마귀할멈)과 같은 잘 알려진 여성폄하적 비속어들을 여성의 품위를 회복시키는 상징으로 회복시켰다.

참고기사/1월6일자 뉴욕타임즈
참고기사 번역/안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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