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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신학자 스힐레벡스, 2009년 12월 23일 선종-"세상 밖에 구원 없다" 주장한 참여신학자
-해방신학 등 상황신학에 큰 영향을 줘.. 교회쇄신의 신학적 근거 제공
  • 헤르만 해링 ( We are church )
  • 승인 2010.01.11 19:36 | 최종수정 2010.01.1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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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신학자 스힐레벡스가 작년 말에 91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추모 열기도 대단합니다. 그의 후임 교수인 내이메겐 대학의 헤르만 해링(Hermann Häring) 교수가 작성한 추모의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매끄러운 번역을 위해 군데군데 의역했습니다.  -옮긴이

 

   

▲ 스힐레벡스
(사진출처/iloapp.kristkonung.se)

2009년 12월 23일 저녁 네덜란드 내이메겐(Nijmegen)에서 에드바르트 스힐레벡스(Edward Schillebeeckx OP)가 서거하였다. 스힐레벡스는 1914년 11월 12일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태어나 1934년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 가운데 하나로서, 1957-1982년에 내이메겐 대학의 신학부 교수였던 그는 가톨릭교회사의 가장 흥미롭던 시기를 함께 체험했고, 그 시기를 함께 형성했고, 또한 함께 고난을 받았다.  

그는 1935년부터 철학을, 1939년부터 신학을 공부하여 1943년 루벵에서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 때 부터 그는 비범한 경력을 시작한다. 초창기에 그는 당대의 문화와 인간의 실존이 어떻게 믿음과 연관맺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동시에 그는 그 당시 프랑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신학’(nouvelle théologie)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톨릭 믿음의 진리가 낯설고 놀라운 체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가톨릭적 진리란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삶게 가깝게 해석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의 첫 저서인 “성사들”(Sakramente 1952)은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고, 그 뒤 1955년엔 마리아론에 대해서 책을 썼다. 1959년에 나온 그리스도에 대한 저서는 1960년에 이미 둘째 판이 나왔고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바로 “그리스도, 하느님 만남의 성사”이다. 그 사이에 스힐레벡스는 인정받는 저자요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강연자가 되어 있었다.

1957년 스힐레벡스는 내이메겐 대학 가톨릭 신학과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는 네덜란드 교회에 크게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그는 그 당시에도 홀로 서 있었다. 동시에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를 열어 젖혀 국제적인 수준의 논쟁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1959년 교황 요한 23세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선포하셨다. 그건 스힐레벡스의 시간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삶과 사상과 실천을 완전히 규정했다. 그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공의회 준비에 참여했고, 네덜란드 주교들에겐 가장 중요한 조언자였다. 스힐레벡스가 작성한, 네덜란드 주교들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사목서한(1960)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공의회 전기간에 걸쳐(1962-1965) 그는 로마에서 전문가들과 주교들과 여러나라의 주교회의 앞에서 강연했다. 그는 네덜란드 TV에도 출연했는데, 그가 출연한 인터뷰 때문에 네덜란드 교회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즉시 이 공의회가 불러운 비범한 역동성이 드러났다. 교회를 위해 쇄신의 새 시대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미 1960년대에 실망스런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힐레벡스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근심”에 빠진 사람들을 보살폈다. 또한 고통의 의미와 고통받는 자들의 의미에 대해 언제나 깊은 관심을 두고 질문했으며, 이는 훗날 해방신학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스힐레벡스는 이런 주제를 때로 “대조체험”(Kontrasterfahrung)이란 용어로 신학화했다. 그는 이 주제를 가장 심원하게 해석학적으로 다루었고,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다각적으로 다루었다.

동시에 스힐레벡스는 광범위한 대중이 이해하는 신학을 정립하였다. 이미 1960년에 그는 당대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 학술지(Tijdschrift voor Theologie)를 창립하였다. 1965년에 그는 몇몇 뛰어난 신학자들(이브 꽁가르, 한스 큉, 칼 라너)과 함께, 교회의 개혁을 추동하기 위해 7개 언어로 된 국제 학술지인 “콘칠리움”(Concillium)을 창립하였다. 이 두 학술지 모두 지금도 간행되고 있다. 공의회 시기가 끝나고 나서, 그는 긴급한 주제들에 대해 그의 말대로 “열병에 걸린 듯” 일했다. 그는 교회와 세계의 새로운 관계, 곧 진전된 세속화를 다루었고, 믿음과 신학의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경제적 변화도 다루었다. 수많은 논문들로 이런 주제들을 연구하며, 그는 가장 비판적인 저술을 남겼고, 새 시대의 발전에 절대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생각에 익숙해진 새시대에 새로운 신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꾸준하게 수행했다.

   
▲ 교회직무론, 스힐레벡스, 정한교 역, 분도출판사
근본적인 이런 해석학적 논문들과 함께, 선구자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예수와 그 의미에 대한 위대한 연구였다. “예수, 한 살아있는 이의 역사”(1974)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새 삶의 실천 역사”(1977)이다. 이 책들은 우리 신앙 언어에 새로운 기초를 놓는 것으로서, 비교가 가능한 책도 별로 없다. 또한 스힐레벡스는 조직신학자에 머무르지 않고, 성경 주석가로도 일했다. 그는 당시 성경 주석학적 토론에 편견없이 참여 하였고, 그의 성서 주석은 그의 교회사 연구와 교리사 연구와 함께 그리스도 신자의 세계관을 풍부하게 하였다. 곧, 세속사적인 측면에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고,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구원과 해방에 대해 깊이있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기초 위에서 그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이론을 심화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새 정치 신학”(Neue Politische Theologie)과 그 뒤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등장한 해방신학을 들 수 있다. 1990년대까지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벌어진 상황신학의 발전과정을 좇았다.

이런 기초 위에 그는 교회 내적 발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는데, 그 대상은 공의회 이후 정체되고 (옳게 묘사하자면) “차가운 겨울”을 몰고 온 교회 내적 상황이었다. 1980년과 1985년 그는 교회 직무에 대해 “교회의 직무”(1981년 간)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교회의 직무. 교회안의 사람에 대한 옹호”(1985)를 저술했다. 이 두 권으로 그의 명성은 더해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교회의 지도층은 이 중요하고 비범하게 건설적인 공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바티칸의 권위는 그를 세 번이나 법정에 세웠다. 그가 공식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적은 없다. 그를 공격하던 자들의 근거가 매우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그의 저술 전체에 심각한 낙인이 찍혔고, 그의 저술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다행히 네덜란드 주교들이 그의 입장을 비판없이 받아들였지만, 그건 새 세대의 주교들이 출현하고 나서였다. 스힐레벡스의 가장 깊고 핵심적인 교회론적 의도는 크게 오해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깊게 신뢰하는 사람이었고, 심원한 도미니코회의 영성으로 말미암아 교회내의 이런 대치 상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았다.

   
▲ 스힐레벡스
(사진출처/www.flickr.com)
1983년 은퇴한 후에도 그는 적극적인 신학자였다. 1989년에 <인간: 하느님의 역사>(1990 간)를 저술했다. 이 책으로서 그는 예수, 은총, 하느님을 주제로 한 삼부작을 완성했다. 이 주제로 마지막 논문이 나온 것은 2000년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의 가장 깊은 영성, 곧 전례와 설교와 성찬례의 한결같은 근원이었던 영성으로 회귀하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소품들, 곧 그의 영성적 주제와 설교, 그리고 그리스도교 믿음의 현재적 의미에 대한 고찰 등도 잊지 말아야 한다. 스힐레벡스는 언제가 믿음 깊은 신앙인이었고 즐거운 인간이었다. 이를 잘 나타내는 그의 저술 두 개를 소개한다: <하느님은 날마다 새로우시다>(1994)와 <저는 행복한 신학자입니다>(1994)

스힐레벡스 신학은 내용적이고 방법론적으로 수많은 자극을 주고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학의 핵심을 필자는 여섯 점으로 요약하겠다.

(1) 나자렛 예수를 발견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선포를 새롭게 하는 자극이다. 공식적 차원에서 이런 자극은 아직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점은 신앙인들이 삶과 기도로 바치는 봉헌물이 문제가 되면 될 수록 더 중요해질 것이다.

(2)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의미를 신앙과 영성에 연관짓기. 예수에 대한 두 권의 저술은 더욱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3) 가톨릭 조직신학에 해석학을 뚜렷이 도입하기. 이는 낯설고 놀라운 교리, 너무 이성주의적인 교리에 대한 해결책(Gegengift)이다. 스힐레벡스는 “비판적으로 전개되는 해석학”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수적인 교리의 남용을 효율적으로 저지했다.

(4)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과 서구 사회의 기본적 선택(Grundoption)으로서 고통받는 자,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

(5) 세상과 사회에 대해 원칙적으로 열려있는 신학적 사고. 이런 신학은 스힐레벡스의 “세상밖에 구원없다”는 정식으로 잘 요약된다.

(6) 끝으로, 스힐레벡스가 이미 초기에 발견한 것으로서, 신학이 다른 학문과, 다른 종교와 협력할 것을 호
소하는 것이다.


에드바르트 스힐레벡스는 다음을 언제나 확신했다: 가톨릭 교회를 위해 새 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봄을 몸소 겪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기뻐하고 행복했던 이 신학자는 풍부하고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그 점에 대해 우리는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느껴야 할 것이다. 200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그의 장례미사에서 그는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다. 그의 천사는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소서.

2009년 12월 28일
헤르만 해링

출처/KirchenVolksBewegung - Wir sind Kirche
번역/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연구원, 홈페이지: www.wonjun.de   트위터: weiterweg ) 

*이 기사는 독일판 <우리가 교회 Wir sind Kirche>의 편집진과 협의해서 허락 후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으로 교회쇄신을 돕기 위해 만든 단체로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기사 공유를 맺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를 위해 필요한 기사를 여러 한국독자들과 나눌 것입니다.

 

기사 원문(독일어)은 다음입니다.
http://www.wir-sind-kirche.de/print_version.php?id=125&id_entry=2322  

네덜란드의 스힐레벡스 재단을 소개합니다.
http://schillebeeckx.nl/  

스힐레벡스의 추모 열기가 대단합니다. 구글 검색창에서 다음을 쳐 보세요.
in Memoriam Edward Schillebeeckx  

또는 아래를 보세요.
http://www.google.com/search?client=safari&rls=en&q=in+Memoriam+Edward+Schillebeeckx&ie=UTF-8&oe=UTF-8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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