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김보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추상은 모든 구체에 대한 폭력이다. 압축 또한 그렇다. 대체 한 인간의 이력을 몇 줄로 압축한다는 것이 되는 말인가. 더구나 섬세한 뉘앙스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사랑의 담론을 몇 줄의 추상적 담론으로 압축한다는 것이야말로 언어도단. 사랑의 담론은 추상적인 히스토리에 있기보다는 시시콜콜한 디테일과 미묘한 뉘앙스를 담은 스토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알랭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반드시 디테일로써 읽어야 할 책이다.

야심에 찬 새내기들은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조직에서 견실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욕망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해서 예술은 일견 패기만만하고 치기어린, 그러나 싱싱하고 약동하는 실험적인 피를 수혈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알랭 드 보통의 처녀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새내기들이 보여줄 수 있는 치기와 기발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드 보통의 철학적 명상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드 보통은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파스칼, 칸트, 마르크스, 예수를 끌어들여 연인들이 겪을 수 있는 감정의 등고선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드 보통은 첫키스에서 말다툼과 화해,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연애의 시종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사랑의 욕망은 모든 사실주의를 방해한다

사랑은 어떤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렇지도 않던 그가 내게 특별한 그 무엇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있게 마련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두 주인공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항공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5,841분의 1이란 확률로 만난다. (이런 확률을 계산해내는 드 보통의 현란한 유머감각이라니!) 누군가에게 불현듯 내가 사랑을 느꼈다면 그에 대한 현실은 증발하고 만다. 남는 것은 내 욕망에 의해 이상화된 연인의 이미지일 뿐.

드 보통은 말한다.“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을 통하여 어떤 주어진 얼굴, 잠깐이나마 기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얼굴에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써 환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P.18)"

왜 아니겠는가. 사랑의 욕망은 모든 사실주의를 방해한다. 누구나 조금씩은 눈이 멀게 마련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는 모든 속물주의로부터 성큼 벗어나 있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P.22)”

이런 식으로 우린 사랑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내 존재를 고양시키리라는 낭만적 허위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것이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P.44)”라고.

대개의 연애소설이 나긋나긋한 문체로 낭만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면 드 보통의 처녀작인 이 소설의 어법은 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세련되고 지적이고 참신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마케터들의 입바른 찬사가 아니다. 역자 후기에서 정영목은 이 소설을 두고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는 것처럼 어떤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라고 했다. 이 책이 주는 매혹적인 가벼움과 재치와 유머를 발랄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드 보통이 첫키스를 말하는 방식은 이렇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운 키스가 시작되었다.(P.57)” 따지지 말자. 드 보통의 애교 있는 과장에 빙긋 웃어주면 그만. 또 모든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파괴적인 열정, 불같은 사랑, 전쟁 같은 사랑 

▲ 알랭 드 보통
좋은 사랑은 얼마나 건강한 서사적 거리(distance)를 회복하는가에 있다. 서정적 몰입은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그 끝은 결국 죽음일 뿐이다. 드 보통은 거리(distance) 조절에 관한 한 전문가다. 사랑에 몰입하다가도 이내 자신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회복한다. ‘인간은 둘로 나누어져 행동을 하는 동시에 뒤로 물러서서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분열로부터 반성이 나타난다.(P.63)’ 모든 사랑의 비극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맹목적인 열정의 포로가 되어, 상대를 소유하겠다는 소유의 독점욕이 결국은 자신과 상대를 물어뜯는 것은 아닐까. 이런 파괴적인 열정을 우리는 ‘불같은 사랑’이니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P.68)’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한 나머지 자신의 존재를 초라하게 인식하게 되는 사랑의 심리학은 그러나 존재를 영웅으로까지 고양시키게 만드는 에너지로 전화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심리학 속에서 그와 나는 늘 ‘그 이상’이어야 만 한다. 그러나 나는 하품을 하고 콧구멍을 후비고, 하루에 몇 번은 방귀를 뀌어야 하는 얼마나 속악한 존재인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바보짓이다.(P.76)’

사랑은 나의 전인격과 그의 전인격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콤플렉스는 치료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내 존재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이 치료되어져야 하는 법은 아니지 않은가. 때론 질병이, 콤플렉스가 하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은 아닌가.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존재를 전율케 하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시각은 사실주의를 획득한다. 나레이터는 자신의 취향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고르는 클로이를 두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현실이 이미지를 대치하는 순간이다. 사랑의 시간이 지속되면 될수록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기회보다는 ‘위협적인 차이성’과 마주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많은 연인들은 ‘성격 차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이 위기를 표현한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누구나 다른 법이다. 하나가 되자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꿈이다. 더구나 취향은 강요한다고 해서 쉽게 같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충고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네가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왜 나마저도 이것을 좋아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우린 아주 궁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 답변을 준비해두곤 한다. ‘우린 남이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어떤 신발을 신어도 상관은 없어, 그러나 너는 남이 아니야. 너는 특별한 존재야. 그러니까 넌 그런 신발을 신어선 안 돼. 바야흐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순간이다.

드 보통은 말한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P.110)’ 엄지 손가락을 비롯한 네 개의 손가락들이 자신의 우위를 저마다 설교할 때, 새끼손가락은 그렇게 말했다던가.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다 병신이야.’ 유머는 모든 무거움과 긴장을 살짝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지나친 진지함은 서로를 압제하려 든다. 따지고 보면 유머는 본질적으로 너를 잃지 않고 싶다는, 너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고 싶다는, 같이 웃고 싶다는 우정의 표현은 아닐지. 그것이 썰렁하든 말든.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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