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박영대]

▲ 공동체 지향에서 발간하던 <공동체 지향>. 그 내용의 일부는 별도 편집되어 인천교구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토론식 예비자교리를 하기 위한 교재로 활용되었다.(사진/한상봉)

1982년 7월부터 2년 2개월 동안의 군복무를 마친 나는 남은 대학 4학년 한 해 동안 전공인 기계공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천주교 인천교구 청년회(인천교청) 친구들이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인천교청은 해직교수, 언론인을 강사로 ‘민중대학’이라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대표적 진보 지식인들의 강의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민중대학은 서울에서도 올 정도로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이에 힘입어 인천교청은 해방신학 등 진보 신학을 소개하는 또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 ‘가톨릭청년사도학교’를 기획하였다.

문제는 당시 청년회 회원 가운데는 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내게 사도학교 기획을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고민 끝에 나는 친구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복학한 뒤 군대 가기 전보다는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인천교청과 본당 청년회 활동에 더욱 힘을 쏟았다. 본당 청년회는 후배들과 직접 만들었는데, 청년회 설립을 준비하면서 보수 성향의 주임사제 마음에 들기 위해 몇 달 동안 새벽 미사를 거르지 않고 참석하기도 했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신앙심 깊은 청년이라고 여긴 주임사제가 신학교 입학을 적극 권하는 탓에 곤혹스러운 일도 있었다.

제1기 사도학교 강사로 문익환 목사를 모셔 구약성서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이때 문 목사님은 출애굽 과정을 해방운동의 관점에서 설명해주셨다. 나중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펴낸 갓월드의 <히브리성서> 내용을 미리 소개해주신 셈이다. 문 목사님은 이때 강의 내용을 나중에 생활성서에 연재했다가 <히브리민중사>를 펴내셨다. 이 강의를 통해 나는 사회학적 성서 해석을 처음 만난 셈이다. 개신교 목사의 강의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 뒤 나는 안병무 등 민중신학자 책들을 열심히 읽기 시작하였다. 아직 해방신학 책들은 번역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미 대학원 진학의 꿈을 접었기 때문에 취직이냐 활동이냐를 두고 고민하였다. 결국 부모님의 완강한 뜻을 이기지 못해 반월공단의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에 취직하였다. 회사에 가니 학교에서 공부만 할 때보다 기계를 설계하고 만드는 일이 아주 재미있었다. 하지만 직장 일과 활동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 주에도 몇 개의 소모임을 했기 때문에, 모임 준비와 참석을 하느라 거의 날마다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결국 6개월 만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청년활동은 접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던 인천교청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크게 평신도 교육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면서 노동자를 위한 각종 교육 자료를 출판하는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하였다. 물론 나의 주된 관심은 평신도 교육이었다. 그때 나는 (가칭)평신도교리교육연구소를 만들고 싶었다.

그때 주안5동천주교회 주임사제로 계시던 호인수 신부는 우리에게 본당 교육관 3층의 방 하나를 내주셨다. 그곳에 모여 우리는 주로 사회과학 공부를 하며 활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1년 넘게 공부했지만 특별하게 내세울만한 성과가 없었다. 우리는 그 동안의 공부를 바탕으로 월간지 <참삶을 찾아가는 지향>을 펴내기로 했다. 이 월간지를 내면서 모임 이름도 ‘공동체 지향’이라고 정했다. <지향>에는 시사 비평, 문화 비평, 청년 교리 교재, 청년 미사 해설 등을 담았다.

청년 교리 교재는 호 신부의 배려로 주안5동본당에서 진행된 청년 예비신자 교리반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이 교리반 경험을 통해 나는 가톨릭 교리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주로 대화식으로 진행하였지만, 교리를 전달하려고 하니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 가운데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했던가? 가르친다는 일은 가장 큰 배움의 과정이었다. 따로 주안노동사목 실무자와 함께 노동자 성서 교재를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사정상 마무리 짓지는 못하였다.

호 신부께서 백령도본당으로 이임하면서 공동체 지향은 김병상 신부의 초대로 주안1동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안1동성당으로 옮기면서 공동체 지향 안에서는 토론이 벌어졌다. 공동체 지향을 일반 소모임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연구자 조직으로 전문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미 평신도 전문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나로서는 연구자 조직에 마음이 끌렸다. 결국 연구자 조직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모임 이름도 '가톨릭민중교육연구회'로 바꾸었다.

우리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서울 명동천주교회 청년연합회의 학술 활동이 큰 자극이 되었다. 이들은 해마다 청년대회를 열었는데 그 중 학술대회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사 등 전문 주제를 다루었고, 그 성과를 다듬어 단행본 <교회와 민족>를 펴내기도 하였다. 명동청년연합회 학술부를 중심으로 가톨릭신앙운동연구회(회장 박준영)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계속)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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