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마지막)

▲ 사진/한상봉

주일학교 수준을 넘어서려면

신학생들에게 강의 중 가끔 하는 말이 있다. 대학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한 뒤 ‘주일학교 수준’을 넘어설 수 있으면 성공한 것이라고... 주일학교 학생, 특히 초등생들은 신을 인간 형상의 확대판처럼 생각하는, 이른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적 상상을 하는 경향이 큰데, 대학에서 명색이 신학을 전공했다면 최소한 그런 방식이나 수준은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존재인양 상상하는 수준도 넘어서야 한다고 강의하기도 한다. 그만하면 신학대학원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는 차원에서...

신이 어떤 형상을 지니고서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듯 상상하는 순간 신학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신을 유한한 시공간 내 제한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신은 더 이상 무한자, 창조자이기는커녕 인간적 상상 내지 욕망의 투사, 시공간에 갇힌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만물은 로고스의 육화

지난번에도 보았지만, 성서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맨 처음에 말씀(로고스)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3),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다.”(1,10)

요약하자면 '말씀이신 하느님'이 삼라만상의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원칙적으로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종파가 따로 없다. 모든 것은 '말씀'의 피조물이자 육화이며, 당연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말씀과 근원적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신명기 30,14)

이러한 신학에 따르면, 이 '말씀'은 하느님의 한 기능이면서 하느님 자체이기도 하다. 하느님과 피조물은 말씀이라는 고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을뿐더러, 피조물 자체가 하느님을 반영하는 하느님의 육화이다. 그런 점에서 피조물은 존재론적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고 성화되어 있다. 모두 말씀이라는 우주적 원리의 충실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져 있다

이런 얘기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바닷가에 나갔다. 아들이 물었다. ‘아빠, 바다의 끝은 어디에 있어?’ 아버지는 대답했다. ‘응, 저 수평선 너머 저 멀리에 있단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깨달았다. 바다의 끝은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서 있었던 그 자리였다는 사실을... "

인간은 '바다 끝'에 서 있다. 바다 끝에 서서는 바다 끝이 저 바다 너머에 있다고 상상한다. 자기가 처한 자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본래 자신 안에 베풀어져 있다는 사실에 낯설어한다. 인간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존재라면, 말씀이 인간의 중심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내 안에 너무나 가까이 베풀어져 있는 말씀이신 하느님, 그것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야훼이신 네 하느님께 돌아오라”(신명기 30,10)

포도나무와 가지

인간은 하느님을 자신의 한 복판에 모시고 있다. 예수는 그러한 원천적 사실에 진작에 눈뜬 분이다. 그리하여 말씀의 결정적 육화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과 괴리되는 사실이 아니다. 예수는 포도나무이고 제자는 가지라는 비유(요한 15)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나무든 줄기이든 모두 포도나무이다. 당연히 포도나무로서의 성품을 공유한다. 예수와 제자들은 한 성품을 공유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허공마저 모두 기(氣)로 이루어져있다는 동양적 사고방식과 한편에서는 통하는 세계 해석이다. 하느님과 삼라만상이 이념과 종파를 넘어 원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서양 사상 모두에 통하는 보편적인 사실인 것이다.

친구 예수

예수가 그런 사실에 눈뜬 이지만, 그러한 사실에 눈 뜬 이를 예수는 ‘친구’라고 부른다.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 동류, 즉 자신과 친구의 관계에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잘 모르지만, 친구는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한 15,15) 자신의 존재 원리에 대해 잘 알고, 삶의 방식이 자신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 원리를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이 오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14,20)

어떻게 "내가 아버지 안에 내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느님이 말씀이고 모두가 그 말씀을 존재론적 원리로 하기 때문이다. 그 존재 원리를 깨닫는 이는 자신을 비워 이웃을 사랑한다.(15,17) 그렇게 사는 이가 예수의 친구이며, 사랑은 하느님, 예수와 상호 내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예수와 친구가 되는 데에 신분이나 종파,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최대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와 '레벨'이 같아진다니, 얼마나 파격적인 듯 단순하고 근본적인 사실인가.

하느님≧예수≧제자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신앙의 원리는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원리는 간단히 도식화하면 “하느님≧예수≧제자”가 된다. 말씀이 예수로 육화했을 뿐더러 만물이 말씀의 구체화라면 만물과 말씀, 즉 하느님의 연결성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하느님=예수=제자”이다. 그렇지만 창조자 하느님은 피조물 인간에 우선한다. 예수도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마르 10.18; 루가 18,19)고 하듯이, 하느님은 역사적 예수에게도 선행하신다. 말씀이 예수로 나타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논리적 근거이다. 그래서 “하느님>예수>제자”이다.

결국 이들을 연결 지으면 “하느님≧예수≧제자”가 된다. 하느님이 피조물 안에 베풀어지고 예수 안에서 알려졌으니, 이들은 상통한다. 서로 통하는 측면이 있지 않고서 어찌 서로를 알고 믿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원천적인 사실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종파 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느끼는 아주 단순하고 간명한 도식이다. 타자부정적, 자기우월적 사실을 내세우다 갈등하고 다투는 소모적인 신앙을 극복하고,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보는 근원적이고 긍정적인 사실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는 때가 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지난 일 년 여 지속되었던 “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의 연재를 마칩니다. 졸고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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