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삼성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수서 쪽으로 오는 데,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학원에서 준 영어 프린트물을 보고 있었다. 7,80년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익힐 법한 문장과 문법수준을 초등학생이 공부하는 듯하여,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이 안쓰러웠고 한편 명민한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영어에의 원망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일상대화에서조차 한 두 개의 영어를 섞어 쓰는 걸 인텔리의 기준(?)으로 여기기도 하니 말이다. 영어문화권에서 생성되어 그 역사성이 담긴 어휘라면, 영어표현을 첨가하여 뜻을 명료하게 해주는 건 풍요로운 대화가 될 수 있을테지만.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의욕을 가지고 CNN을 보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의 소재에 따라 전/현직 관료들과의 인터뷰가 첨가되었다. 나이든 전직 관료들의 영어를 듣노라면 그들의 성장배경이 고스란히 억양에 배여든 걸 느끼며 미소 짓게 만들었다. OOO스키 OOOO프 등등, 슬라브 민족의 성명이 붙은 관료들의 영어발음에는 러시아의 거대한 숨소리와 19세기 중후반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이어진 그들의 이민 역사의 역정이 녹아있었다.
-크. -츠 등 탁성이 은연중 배어있고, 억양 속에 그들이 혹은 그들의 부모, 조부모 세대의 터전인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의 토양이 섞여있었다. 007시리즈의 주제곡이기도 했던 <From Russia With love>의 구절들은 이들 러시아 이민세대들의 감정이 녹아들어간 듯하다(내 느낌에). 그들이 삶을 일궈내기 위해, 잃었던 그래서 되찾고 싶은, 사랑이 담겨 있어 애잔하다
* From Russia With Love *
From Russia with love I fly to you
Much wiser since my goodbye to you
I've travelled the world to learn
I must return from Russia with love
I've seen places, faces
And smiled for a moment
But oh, you haunted me so
Still my tongue tied, young pride
Would not let my love for you show
In case you say, no
To Russia I flew but there and then
I suddenly knew you'd care again
My running around is through
I'd fly to you, from Russia with love
19세기 중/후반이 배경이 된 러시아 소설을 보면 아메리카 신천지를 흡사 천국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춥고 어두운 농노제의 러시아를 탈출하는 하층민출신의 청년들과 범죄를 저지르고 밀항을 해서 아메리카로 떠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소용돌이를 만나게 된다. 당시의 미국 역시 노예제사회였건만...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속에도 라스꼴리니코프의 여동생을 사랑하여 그녀와 미국행을 꿈꾸는 남자가 나온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새생활을 찾아 아메리카로 가고자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고, 남자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서유럽의 소설과 현실에서도 신세계로 묘사된 미국을 향해 청교도 신자들과 그들과 어울리기 어려운 범죄자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그 곳에서 어우러지며 새 삶을 개척한다.
러시아 출신의 유태인들과 노동자들 역시 굴곡진 그들의 생을 동유럽에 떨쳐버리고 미국에 닿았을 것이고 이들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와 개인적 히스토리가 겹쳐지며 욕망을 이루어가며 미국을 천국과 지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 사이에서, 주류 언어인 English를 사용하는 앵글로색슨족은 6,70년대 시골구석에서 명절이면 서울말을 쓰며 나타나는 사람들 같았을까?
아무튼, 비 앵글로색슨족들은 영어를 습득하였지만, 모국어의 기본 인프라를 바꾸기는 어려웠기에, 그들의 발음 속에 출신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호적등본의 기록인듯, 유년시절의 상처나 첫사랑의 기억처럼.
꿈을 안고 닿은 미국이 그들에게 녹록한 곳이 아니었음은 많은 자료들이 말해준다. 허나 넓고 비옥한 대지는 그들을 품어 안고 길러주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의 후손들이 자라서 교육을 받아 성공한 사례가 바로 브레진스키(폴란드 출신이라지만), 혹은 노암 촘스키일 것이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이들의 성공신화 속엔 그들 가계의 삶이 송두리째 볼모로 잡힌 아픔과 이들의 삶에 의해 밀려난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숨겨있을 것이다.
러시아 이민세대들이 익힌 영어 속에는 슬라브 민족만의 고유성이 담겨있듯, 한국인들이 영어 속에도 코리안의 태생적 숨결이 배어들어 콩글리쉬가 되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아쉬움에 젖어드는 걸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콩글리쉬조차 아쉽고 그리워지니... 적어도 콩글리쉬 속엔 우리만의 숨결이 담겨있었는데 하는 미련이 서서히 마음 안에 실체를 형성한다. 벗어나고자 했던 것들이 실은 나만의 고유성이었음에 당혹스럽다. 영어권자들의 우월감과 차별의식이 만들어낸 단어, 콩글리쉬 속엔 미국에의 성공신화를 찾아 한국을 떠났던 이민세대들이 낯선 미국 땅에서 그들을 침입자로 열등한 자로 보는 시선을 감당하며 일궈낸 삶이 담겨있다. 그리고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을 터야만 한국사회의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의 안도감까지 배어들었을 것이다.
강남의 새로운 세대들이 습득하는 영어문장과 발음은 콩글리쉬가 많이 제거되었을 것이다. 더욱 본토발음에 가까운 영어문장이 아이들 입에서 튀어나올 듯하다.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살고도, 우리말을 익히지 못한 백인 할머니를 알고 있다. 아시아에서 들어온 노동자들이 6개월이면 익히는 대화를 그녀와는 영어와 독어 등 다국적 언어를 사용해야만 대화가 가능하다. 미주/유럽권 사람들이 누리던 19세기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자/타 상호적 환경이 그녀를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다룬 영화를 보면, 세상이 끝난 듯 망연자실하는 인물들과 만난다.
그러나, 2000년을 건너 화면 밖에서 영화를 지켜보는 나에게, 그들의 허둥댐은 시공간 속에 자리한 사람의 한계를 절감하게 해준다. 라틴어를 썼을 그들이, 영화 속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며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현실에서 소멸되어간 라틴어... .
수천 년의 역사를 머리에 담고,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나는, 하느님의 언어가 모국어임을 새기며 그 언어의 서투름에 자괴감을 느낀다.
/이규원 2007-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