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10]

▲ 수고한 발에게도 산티아고 성당과 함께 사진찍는 영광을 드렸다.

산티아고, 길이 시작되는 곳
2008년 6월 27일 

수도원을 개조한 알베르게는 시원하고 편안했다. 어젯밤 산티아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어 길을 잃었는데 일본인 순례자 한 분이 알베르게까지 데려다 주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면 누구든 꼭 나타나 언제든 그분이 나와 함께라는 걸 확인시켜주신다.

일본인 화가 한 사람이 중국에서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까지 걸어온 길을 지도로 그려 여기 성당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볼 수 없었다. 벽돌 사이로 이끼와 들풀이 자라난 성당에서 산티아고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도시는 활기차고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성당 앞에선 지금 막 도착한 사람들이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환호를 하고, 서로 축하의 포옹을 나눈다. 햇살이 눈부셔 반쯤 실눈을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오래된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아득하다. 

▲ 산티아고 성당 회랑. 바닥은 성인들의 무덤인 듯

산티아고 성당의 순례자 미사엔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감동이 가득한 미사가 끝나고 영성체 시간이 되자 순례자들이 성체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신부님 몇 분이 차례로 줄선 순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주고 계시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가림막을 넘어 새치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밀치고 파고드는 사이, 줄은 순식간에 무너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례랍시고 이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영성체 조금 먼저 받겠다고 법석인 모습을 보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인간들은 어째서 이리도 불완전한 것일까!

그 순간 내 눈에 어느 신부님이 비쳐들었다. 신부님은 헝클어진 줄 사이로 여기저기 손을 뻗으며 아우성치는 순례자들에게 말없이, 골고루 성체를 나눠주고 계셨다. 줄을 서라고 말씀하시는 법도, 꾸짖거나 타이르는 법도 없이 그저 당신이 하실 일, '그리스도의 몸'을 순례자들 손바닥에 경건하게 놓아주시는 일, 그 일을 하실 뿐이었다. 그 신부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느꼈던 혼돈은 간 데 없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고요함과 평화가 느껴졌다. 모든 게 완전한 이 길에서 제일 불완전한 것은 사람이고 어쩌면 그 때문에 사람이 제일 아름다운지도 모른다고, 이 불완전한 사람을 통해서만 그분의 뜻이 온전하게 드러나는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실은 사람이야말로 모든 피조물 중에 제일 완전한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미사가 끝나고 한국인 친구 둘을 만나서 함께 '까사 마놀라'에 갔다. 이 식당은 값도 싸고 맛도 좋을 뿐더러 양이 푸짐하기로 소문나 순례자들에게 인기 있는 식당이다. 지난 월요일에 여기 도착했다는 지은씨는 파울로 코엘료를 직접 만났다고 했다. 산티아고 근처에 '파울로 코엘료의 길'이 생겼다는데 행사에 참석하려고 아저씨가 직접 산티아고에 왔다는 거다. 지은씨는 코엘료 아저씨와 함께 찍은 사진과 크레덴시알에 받은 사인을 보여주었다.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다정하고 북새통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는 아저씨, 『연금술사』같은 매혹적인 글로 내게 이 길을 알려준 아저씨를 언젠가 한 번 만나봤으면….

▲ 알베르게에서 바라본 산티아고 시내

오후 내 나는 성당 앞 광장에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회랑에 기대 잠이 든 사람들도 있고 나처럼 해바라기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며칠 전, 꿈속에서 나는 어려운 질문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질문에 답해주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혼자 할 수 있다."

이 길에서 나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생각'이 많이 없어진 것? 주저하고 머뭇대는 일이 줄었다는 것? 또, 전보다 두려움이 덜해졌다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나는 이제 혼자가 된다거나 헤어지는 것을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이별도 끝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끝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쩜 내 기적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보름달이 뜬 묵시아 바닷가에서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 순간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가 길이 끝난 곳이 아니라 길이 시작되는 곳에 와있다는 사실, 바로 그거였다.

부엔 까미노, 순진!
2008년 6월 29일

▲ 다시 그림자를 밟고, 나는 길 위에 선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성당 앞. 지금 막 도착한 순례자들이 감격에 겨운 기도를 바친다. 그동안 숱하게 흘렸을 땀과 눈물, 혼자서 맞서야만 했을 통증과 괴로움, 그 모두를 이기고 걸어온 길이다. 그 길의 끝에서 자신을 낮추고 앉은 순례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콧등이 시큰해온다. 대체 산티아고는 무엇이길래 숱한 사람들이 오랜 시간 그 먼 길을 걸어와 시린 새벽 광장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일까. 

이제 산티아고를 떠난다. 지금까지 모든 게 꿈속의 일인 것만 같다. 이 길을 걸어온 게 정말 내가 맞을까. 여기가 정말 산티아고였을까. 힘들었던 순간도 가슴 벅찬 기억도 길 위에서 흘린 눈물과 온 몸으로 드렸던 기도도 이제는 여기 없다. 내가 소중했다고 또는 아팠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시간의 저쪽 편에 있었다. 나는 그 시간들을 건너왔지만 그 시간들이 나는 아니었다. 순례길 위에서 겪었던 것뿐만 아니라 내 삶에서 겪었던 상처와 갈등들이 이미 내가 지나와버린 시간의 저쪽 편에 있었다. 이쪽에 와서 보니 저 건너에 있는 일들은 지금껏 내가 생각해온 것만큼 큰 일이 아니었다. 내가 꽁꽁 간직하거나 매달려있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지막으로 산티아고 성당 광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문득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고도 싶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되고 싶은 것들은 이미 내 안에 다 있었다. 뭔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나였다.

저 길에서 나는 내가 평생 보물인 줄 품고 다녔던 돌멩이와 진짜 보물을 맞바꿔왔다는 걸 알았다. 보물은 사실 처음부터 몹시 가까운 데 있었다는 것도. 이 먼 길이 그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도.

▲ 순례자의 기도
언젠가 누군가 까미노는 인생길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길 위엔 정말 삶의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만남과 헤어짐, 희망과 절망, 좌절과 인내, 고통과 위안, 사랑과 미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길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가 어쩜 이 세상을 떠나 내 근원으로 돌아갈 때와 비슷할 거라고 짐작했다. 창밖으로 점점 작아져 마침내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까미노를 내려다보며 나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죽음은 왔던 데로 돌아가는 것,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였다. 상상했던 것처럼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산티아고를 떠난 비행기는 1시간 30분을 날아 파리에 도착했다.
한밤중에 세느강으로 나가 강바람을 쐬었다.
올라, 부엔까미노!
석 달을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살던 이 멋진 인사를, 정작 나 자신에게는 한 번도 못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나에게 속삭였다.
"올라, 부엔까미노 순진!" 

▲ 도장으로 꽉 찬 두 번째 크레덴시알


김순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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