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우리 집 근처에는 꽤 괜찮은 보리밥 뷔페 집이 있다. 일단 가격이 저렴한데다가 (그런데 원래 사천원씩 하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 오백원이 올랐다. 그래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나름대로 다양한 음식 가짓수가 그럴 법 하고, 무슨 스포츠 신문이 선정한 맛 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기도 한 바, 손님들은 그 현수막의 내용을 대부분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다. 나 역시 마누라의 강요에 의해 저녁을 굶어야 하는 날이면 점심이라도 충분히 챙겨 먹으려고 그 곳을 찾곤 한다. (뱃살을 빼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매우 성가실 때가 있다. 매우 불쌍한 나는,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저녁을 굶어야 한다.)

허나 모든 뷔페가 그렇듯이 이 곳 역시 엄청난 식욕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음식과의 한 판 전쟁을 치르곤 한다. 물론 나 역시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집에까지 걸어오는 약 500미터의 거리가 마치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한 마지막 도정처럼 힙겹다. 왜냐구? 하도 많이 먹어 호흡이 곤란하니까... 곤란하거나 말거나 나는 그 집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사람이다. 각설하고...


왜 제육볶음이 없는 것인가

엊그제 딸네미와 함께 그 뷔페를 찾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제육볶음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왜 제육볶음이 없는 것인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내가 그 맛있는 제육볶음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떤 아줌마 사단이 그 많은, 끝없이 리필 되는 제육볶음을 다 먹고, 되도 않는 돈까스 나부랭이만 진열대에 남겨 놓았다는 말인가.

그곳을 찾을 때면 의례히, 느긋하게 제육볶음과 쌀밥 조금, 각종 쌈들과 청양고추로 에피타이즈를 즐긴 연후 보리밥을 산채에 듬뿍 비벼 먹고 잔치국수 한 덩이를 먹은 후 수정과를 먹는 것이 나의 순서이거늘, 이거 초장부터 낭패다 싶었다. 크게 물어보면 매우 쪽팔릴 것을 저어한 나는 슬며시 카운터의 사장에게 다가갔다.

“제육볶음을 도대체 누가 다 먹었는지 진열대에 없습니다. 허허...”
“돈까스가 있는데요.”
“허지만 제육볶음이 다 떨어진 관계로...”
“오늘은 제육볶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돈까스도 돼지 앞다리 살이라 맛있을 겁니다. 한 번 드셔 보시지요. 오늘은 김밥도 있지 않습니까?”
“오후에는 제육볶음을 하나요?”
“오후에도 안할 겁니다.”
“제육볶음이 좋은데...”

이미 제육볶음이 있을 것으로 상정하고 접시에 각종 쌈과 청양고추, 그리고 막장을 얹은 나는 힘없이 바로 그 접시에 돈까스를 담아가지고 와서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딸네미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아빠. 맛있어?”
“뭐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먹을 만하기는... 퍽퍽해서 미칠 뻔 했다.
그럭저럭 다 비우고 다시 보리밥 양푼에 밥을 담아 비벼서 멸치젓갈과 함께 쌈을 싸 먹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놀랐다.


기껍고 든든하다, 우리의 아줌마들

서로 집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교회에서 오신 것으로 짐작되는 두 아주머니의 테이블에, 정확히 표현하자면 회전초밥 집의 접시가 쌓인 것처럼 산같이 뷔페 접시가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으아... 일본에서 판을 친다는 소위 푸드 파이터가 울고 갈 양이었다.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아 우리의 아줌마들이여... 그 엄청난 내공이 식욕에서도 발휘되나니.

예전, 그러니까 구한말, 비숍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외국 여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본, 그리고는 경악한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단다.

첫 번째, 어떤 포졸이, 자신에게 돈을 꿔가고 안 갚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 툭툭 쳐가며 빚 독촉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때, 어디서 빨래 방망이를 든 여자가 나타나서 내 신랑한테 왜 행패를 부리냐며 그 포졸을 두들겨 패고 물어뜯으니 포졸이 피를 흘리며 도망갔다는 사건. 두 번째, 시골에서 막 들일을 끝낸 아줌마 셋이 모여 앉아 함지박에 밥을 넣고 각종 푸성귀와 장을 섞어 비벼 먹는데 넉넉잡아 황소 한 마리가 먹을 분량인 것을 보고 기겁하였다는 사건이 그 것이다.

외국에서 신랑 기다리며 분이나 발라대던 인간들이 어찌 알겠는가. 남자를 능가하는 들일의 고수들이 먹어야 하는 식사량의 규모를... 남자는 강해서 어쩔 수 없다고 징징대던 서양의 아줌마들이 ‘내 신랑, 내 새끼 건드리는 놈은 다 죽여버릴껴’의 경계를 어찌 이해할 수 있더란 말인가...
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껍고 든든하다. 우리의 아줌마들이...


보리밥 뷔페에서 쐬주나 빨고 있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밥을 먹다가 다시 그 테이블을 쳐다본 순간, 나는 깨끗이 치워지고 새롭게 놓여 있는 세 개의 접시를 발견했다. 아주머니들은 순두부와 샌드위치로 디저트를 즐기고 계셨다. 제육볶음이 있건 없건 그 분들은 개의치 않으셨다. (가만히 보니 나만 제육볶음 타령을 한 듯 했다.)

바로 그 때, 옆 자리에서 몇 가지 안주가 될 만한 것으로 간신히 접시를 채우고 술병을 기울이고 있던 두 사내가 소곤거렸다. (당당치 못하게 정말 소곤거리고 있었다)

“야 내 마누라가 저렇게 먹으면 우리 금방 거지 되겠다.”
“에이 품위 없게 저게 뭐 하는 짓이야?...”

품위? 대낮에 보리밥 뷔페에서 쐬주나 빨고 있는 니들은 품위가 만땅이냐? 에이 칠칠치 못한 칠득이 같은 인간들....

나는 두 술꾼들을 배제한 채로 뷔페 안을 휘 둘러보았다. 모두들, 마치 포수 허리춤에 까투리 잡아매듯 매우 뿌듯하게 접시를 서 너 개씩 올려놓고 듬직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듬직함의 주류는 자랑스런 이 땅의 아줌마들이었다.

많이들 드십시다. 접시에 괴기 조각 올려놓고 장난치듯 오려가며 먹는 짓은 이제 그만 합시다. 김밥을 상추에 싸서 제육볶음 올리면 그게 전주의 그 유명한 오원집 메뉴고, 양푼에 담겨 있는 비빔냉면 걷어다가 수육 올려 같이 먹으면 최고급 냉면 먹는 방식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고사리에 무나물, 생취나물에 참나물 얹고 숙주 콩나물 얹으면 세계 최고의 웰빙 식단입니다. 무엇보다도 배추김치는 썰지 말고 죽죽 찢읍시다. 청포묵과 도토리묵에 기름장을 붓고 우무에도 기름장을 부어 아이들도 먹입시다. 고놈들 단박에 햄버거, 피자를 멀리 할 겁니다. 구색 맞추려 갖다 놓은 크림 스프는 떡 지도록 놔두고 청국장에 육개장을 떠먹고 비벼먹고, 생각만 해도 건강해지는 느낌입니다.

입에 침이 고여 언필칭 헬렐레 하며 글을 쓴다

 

/변영국 200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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