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시사비평]-2차 일제고사 유감

▲ 지난 3월 서울교육청 앞에서 일제고사 폐지를 위해 농성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사진출처/happy.makehope.org)

나이가 들면 시험도 늘어

어느 날 출근길이었다. 내 옆에서 초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 셋이서 자기들 덩치만한 가방을 매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등교를 하고 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한자 경시대회 준비해야 하는데…" 라고 말하자 다른 남자 아이 왈 : "나이가 들면 시험도 늘어". 난 어안이 벙벙하여 이 셋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왜?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는 대학 못가고 싶어?!

대학생 때 '베이비 시터'라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서너달 동안 7살짜리 유치원 다니는 여자아이와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했는데, 그 집에는 오빠가 한 명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아이들의 엄마가 오빠를 엄청 혼내는 것이다. 귀기울여보니 오빠가 엄마한테 혼나는 이유는 영어공부를 안 하고 놀이터에서 놀았기 때문이었다. 엄마한테 매 맞으며 아이가 "나도 나가서 놀고 싶어~" 라고 울면서 말하자 아이의 엄마는 "너 이렇게 놀아서 나중에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그래? 남들 다 서울연고대 갈 때 너는 대학 못가고 싶어?!" 라며 계속 아이를 혼냈다. 그 아이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 아이를 혼낸 엄마의 사고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또한 자식의 교육 문제를 '엄마'와 동일시시키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나는 이 아이들의, 청소년들의 '희망'이 무엇인지, '꿈'이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이 사회를 향해 묻고 싶을 뿐이다.

시험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약 6년 전에 초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아이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오는 입시 앞에서 허덕이고 있음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수능성적이 좋아야 하고,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좋은 학원에 들어가야 하고, 좋은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학원 입학 시험을 봐야 하고, 그것을 위해 또 과외를 하고, 또 그것을 위한 학원에 다니고, 또 시험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것은 '시험'이라는 출근길에 만난 아이들의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그것이 이 땅의 학생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온갖 송년회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12월 23일, 두 번째 일제고사가 시행되었다. 2008년부터 시행된 일제고사(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과정에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의 학습 선택권, 교육권, 표현의 자유 등에 관한 인권침해가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관련 체험학습 선택권을 주었다는 이유로 교사들이 해직되었고, 일제고사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강제적으로 보충수업을 받고 있다. 특히 학생들 사이의 경쟁을 조장하는 수준이었던 기존의 시험들과는 달리 일제고사는 학교간의 경쟁까지도 조장하고 있다.

성적과 입시만을 위한 교육이라면 차라리 학교를 없애라

학교간의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싶지 않은 학교들은 일제고사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해당 학교 학생들을 쥐어짜기에 이른다. 결국 학교는 '성적'만을 위한 교육의 기능을 하는 기관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만이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그 내용이 어떠한가가 핵심이다. '교육'이라는 껍데기에 오로지 '시험과 성적'이라는 알맹이만 있는 씨앗을 땅에 심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육'의 목표는 성적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혹시 성적과 입시만을 위한 교육이라면 차라리 학교를 없애라, 고 말하고 싶다.

학생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중요한 인권 중 하나이다. 국가가 앞장서서 그 교육의 내용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면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교육의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교사들 또한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교과부는 일제고사를 다시 도입하면서 "국가 수준에서 학생들의 학업성취 수준을 파악하고, 학력격차 해소 및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교육정책 수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의 인권침해를 조장하고, 성적에 따른 과잉 경쟁과 서열화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이미 '반교육적 정책'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교과부의 "학력격차 해소 및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교육정책 수립"이라는 명분을 고려한다고 해도, 일제고사는 그 명분을 부합시킬 수 없는 반인권적인 정책이다. 실패한 정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두 번 실시할 것이 아니라, 당장 폐지해야 함이 마땅하다.

좌석도 성적순이던..

필자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앉힌 적이 있었다. 필자가 앉았던 정확한 위치를 알리기에는 매우 민망하니 그냥 "앞쪽은 아니었다"는 수준으로 밝히도록 하겠다. 난 솔직히 공부에 관심은 없었고,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부여가 전혀 없었다. "선생님 이걸 왜 공부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많은 선생님들의 대답은 "시험에 나오니까" 였다. 수업시간에 떠들면 "지금 얘기하는 거 시험에 나온다" 한 마디면 조용해졌다. 그 만큼 '시험'은 학생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었고, 지금은 인생의 전부가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징그러운 세상인가.

최근 '출산 정책'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서 난 코웃음이 났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 대한 '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세상은 잔인하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건 시험"이라고 말하는 이따위 세상에, 행복하게 사는 법이 아니라 불행하게 사는 법을 몸소 배우는 학교라는 공간에 아이를 밀어 넣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교육'이라는 것이 그저 '좋은 성적을 내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이상 이 사회의 많은 것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출근길에 만났던 그 초등학생들은 한자경시대회는 잘 치뤘는지, 이번 겨울 방학 때 학원은 몇 개나 다닐 런지.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는 놀이터에서 몇 번이나 더 놀았을까, 혹시 또 엄마한테 걸려서 혼나지는 않았을지. 나랑 귀신놀이 하던 7살짜리 꼬마 아가씨는 내년이면 중학교에 입학할 텐데 그 모진 시간들을 잘 견딜 런지. 문득 궁금하다. 그저 '힘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는 걸까?

배여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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