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침묵의 언어/ 책 읽는 소리

침묵의 언어

문화인류 학자 에드워드 홀의 저서, <침묵의 언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고 있다. 홀이 리오그란데 부근의 푸에블로 인디언 마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겪었던 이야기가 그것이다.

추위를 참으며 아무리 기다려도 무도회는 시작되지 않더란다. 여러 백인 참석자들은 우리 식의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도대체가 시작할 기미가 없더라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 거의 기진맥진해 있을 무렵,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북소리가 나며 무도회가 시작되더라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경험한 후 몇 년이 지나도록 건전한 상식(?)을 지닌 백인들은 그 의식이 언제 시작되는지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도회는 어떤 특정한 시각에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무도회는 어떤 특정한 스케줄에 따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디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시작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시간 관념을 우리네 시간 관념으로 재단하여 가타부타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는 기계적 분절에 의해 만들어진 시간을 살기 훨씬 이전부터 푸에블로 인디언식의 시간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 파종을 하고, 곡식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추수를 했고,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 결혼을 했고, 달이 충분히 찼을 때, 아기를 낳지 않았던가. 생각건대 여름은 충분히 여름의 신고(辛苦)를 겪었을 때, 비로소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은 충분히 겨울의 고통을 겪었을 때, 비로소 봄을 맞이한다. 그러니 계절의 순환을 주관하는 심판자에겐 '사태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를 판단하는 각별한 인식장치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때가 되면 여자아이들의 가슴이 볼록해지고 사내아이들의 목젖이 굵어지는 것도 조물주의 시간 인식 장치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말해준다. 아무튼 자연엔 다 때가 있는 법이니, 그 '때'를 알아보는 푸에블로 인디안의 감식력을 두고 원시적이니 뭐니 하는 가타부타의 문화론도 온당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소나기가 그친 여름하늘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코끼리와 돌고래와 자동차의 형상을 구름 속에서 찾아내던 시절, 시간은 달팽이의 보행을 닮아 참으로 더디게 흘러갔다. 모든 것이 경이(驚異)였고 모든 것이 신비였다. 땅 끝 너머는 무엇일까, 우주에 끝이 있다면 그 끝의 너머는 무엇일까, 나는 정말 엄마의 배꼽에서 온 것일까, 땅강아지들은 어떻게 땅 속에서 눈을 뜨고 살아갈까. 강아지들도 꿈을 꿀까, 백두산 천지에 빠지면 친구들 말대로 바다로 흘러나올까, 모든 것이 궁금했던 시절,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보아야 할 것도 많았고, 느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호기심의 영역은 급속도로 영토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하늘의 뭉게구름에서 형상을 읽어내던 버릇도 사라져버렸다. 그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책 읽는 소리

정민 교수의 <책읽는 소리>를 읽다보니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그 아버지의 생전 기억을 적은 책 <과정록(過庭綠)>에서 아버지의 한 말씀을 전한다.

"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

이런 구절대로라면 박지원은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에 대한 신비와 경이의 시선을 잃지 않은 듯하다. 박종채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매양 냇가 바위 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이런 구절을 두고 박지원의 사실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건 전적으로 해석자의 자유다. 나는 이런 대목에서 그의 천진난만한 시선,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 아이의 시선을 읽는다. 그의 눈은 대충 보아 넘기는 법이 없다. <열하일기>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챙긴다. 길가에서 본 사소한 풍경, 여관방에 씌어진 낙서, 중국 여자의 헤어스타일이나 장신구 등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보고 그것을 적었다.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한 붓이 총명한 기억력을 이긴다던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그는 깨알같은 글씨로 메모를 했다.

<책읽는 소리>가 말해주는 이덕무 또한 박지원에 버금가는 꼼꼼한 시선의 소유자였고 메모광이었다.

"4, 5월에 숲이 무성해지고 과실이 갓 열려 새들이 우지질 때, 여린 파초잎을 딴다. 파초 잎새의 줄기 사이에 왕유(王維)의 `망천절구(輞川絶句)`를 미불의 글씨체로 쓴다. 넓은 파초잎에 가득 써진 글씨가 예뻤던지 곁에 있던 꼬마가 갖고 싶은 눈치를 보인다. 파초잎을 꼬마에게 냉큼 주면서 대신 호랑나비를 잡아오게 한다. 호랑나비의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에 어려있는 금빛과 푸른빛을 한참동안 찬찬히 살펴보다가 산들바람 사이로 날려 보낸다."

호랑나비의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에 어려있는 금빛과 푸른빛을 세밀하게 볼 줄 아는 눈, 우리가 잃어버린 저 유년의 시선이다. 경이와 신비를 읽어낼 수 있었던 눈. 이덕무는 그 눈으로 보고 메모해 두었던 것을 모아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는 책을 묶었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전혀 한가롭지 않다

박지원이나 이덕무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빠르게 지나쳐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여기저기 한눈을 파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사소한 사물 하나에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진다. 잔뜩이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시간은 아주 차분하고 정갈한 호흡을 가진다. 그러나 박지원이나 이덕무의 눈은 바쁘기 그지없다. '면앙정가'를 쓴 송순 또한 바쁘기로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 그는 '면앙정가'에서 노래했다.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대단한 유머요 역설이다. 자연 속에서 전혀 한가롭지 않다는 얘기다.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은데 한가로운 시간이 어디 있냐는 얘기다. 저 선인들의 삶 속에는 이렇듯 한가로움과 분주함이 하나의 시간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들은 분주했으면서 동시에 한가로웠으며 한가로우면서 또한 바쁘기 그지없었다.

『책읽는 소리』에는 탐닉하고 싶은 구절들이 여럿 눈에 띈다.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 젊었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란 뜻이다.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한가로운 것이 아니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한가로움이라는 얘기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말이 쉽다. 이리 묶이고 저리 묶인 범인(凡人)들로선 언감생심.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얘긴가. 한가로움 하나 쟁취하는 데도 어지간한 내공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면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고갈된 것은 아닐 것이다. 노랗게 변해버린 은행나무의 거리를 범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신경이 무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네 삶을 관통하며 우리의 활동을 조직하고 종합하고 통괄하는 시간, 우리의 능력과 성과를 판단하는 척도로서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잃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신비의 시선, 경이의 시선이 아닐까.

▲ <책읽는 소리>에 있는 삽화 한 장면

까마귀는 까맣지 않다

좋은 글이 우리를 충만하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글이 지니는 풍부한 시간성 덕분이리라. 박지원이나 이덕무의 글은 우리가 지나쳐 온 것들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준다. 거기에는 우리가 지나쳐버린 시간들이 풍부하게 고여있다. 그들은 사물의 단순한 외양만이 아니라 그것의 얼개와 구조까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박지원이 까마귀의 빛에 대해서 쓴 글을 보자.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까마귀가 검다고 하는 것은 까마귀를 본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검다는 관념을 본 것이라는 얘기다. 세심한 눈은 관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본다. 오직 게으른 눈만이 실체를 보지 않고 관념을 볼 뿐이다. 우리가 배웠던 지식,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관념체계가 우리의 시각을 무디게 한 것은 아닌지. 지식이란 눈가리개 덕분으로 우리는 세계를 아주 편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사물의 실체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닌지.

시는, 이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시는 새롭게 보는 기술이다"라는 정의는 어떨까 싶다. 매일 보아오던 인식에 균열을 주어 사물을 새로운 질서 속에 드러내는 일이 시쓰기는 아닐까. 아무튼 정의의 적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정의대로라면 까마귀를 까맣다고만 보지 않은 박지원의 눈이야말로 시인의 눈이 아닌가 싶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세상은 이러저러하다는 관념은 내 나름대로의 판단력을 요구하지 않으니 기성의 관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손 안 대고 코푸는 방식일 것이다.

내 식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 식으로 세상을 정의하고 규정하기엔 역부족이다. 빨리 투항해버리는 것이 낫다. 하지만 우리에겐 든든한 우군이 있다. 박지원의 책이 있고 이덕무의 책이 있다. 뿐이랴 도서관엔 '잘 느낄 수 있는 영혼'과 '예리하게 사물의 핵심을 파고 들었던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꼼꼼하게 기록한 선배들의 기록들이 있다. 책장을 열어 그들의 목소리에 나의 눈과 귀를 주는 것은 새롭게 세상을 보기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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