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10]

▲ 산티아고 대성당

2008년 6월 16일 산티아고-피니스테라Santiago-Finistera

이게 제가 가진 전부예요

아직 어둑한 새벽, 비 내리는 산티아고 성당 앞에서 오카리나를 불었다. 지치고 외로울 때, 용기가 필요할 때, 빈 들판에서건 알베르게 구석 빨래터에서건 위안이 되어주던 오카리나. 길 위에서 눈물과 땀으로 연습한 노래를 이 아침, 신께 바쳤다.
"하느님, 당신께 드릴 것이 이것뿐입니다. 이게 제가 가진 전부예요."
지금껏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다해 연주했다. 산티아고 성당이, 이 광장이 신은 아닐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어떤 힘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맞은 편 회랑에 앉아 한참이나 물끄러미 성당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감격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성당은 너무도 익숙한 평화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게 북받쳐 울음이라도 터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덤덤하고 담백한 마음이었다. 동시에 야릇한 서운함이 느껴졌다. 지금껏 왜 이 먼 길을 걷느냐고 물어온 사람들에게 '산티아고에 있는 내 기적을 만나러 간다!'고 대답해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나는 정말로 내가 산티아고에 닿기만 하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눈부신 빛이 나를 감싸줄 줄 알았다. 지금껏 의지해온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나는 다 나았다! 기적이 일어났다!"하고 소리치게 될 줄 알았다. 성서에 나온 소경과 앉은뱅이의 기적이 내게도 일어날 줄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다. 내 발목은 여전히 퉁퉁 부어 있고 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도 여전했다.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와 불면으로 두통도 있었고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망도 여전히 내 안에 앙금처럼 남아있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책에서 읽은 이야기와는 달리 산티아고는 그저 평범한 도시에 불과했다. 에메랄드로 지어진 왕궁도 없었고,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법사도 없었다. 나는 시무룩해졌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기적이니 치유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고 여기까지 오다니, 바보다. 애초부터 신이나 기적 따위가 있었다면 내 삶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가 없었잖아. 바보, 속았어.

이런저런 생각에 설핏 잠이 들었나보다. '땡그렁!' 동전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호스텔에서 나온 친구들이 내 앞에다 동전을 던져준다.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엉켰지만 친구들을 보니 금세 웃음이 나온다. 친구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나는 순례자 사무소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땀과 비에 젖은 순례자들이 많은 이야기가 담긴 표정으로 줄을 서 있다. 땀냄내와 파스냄새, 장한 냄새 진동하는 사람들 틈에 줄을 서서 순례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이제야 다 왔다는 것이 조금 실감난다. 친구들과 엇갈려 길을 헤매는 동안 어떤 할머니가 오셔서 뭐라고 하시더니 내 볼을 쓰다듬고 뽀뽀를 쪽 해주신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구나 얘야. 참 장하다. 축하한다!" 내 느낌이 통역해준 말은 이랬다.

▲ 줄 끝에서 춤추는 향로, 보타푸메이로

순례자 미사, 이제 다 나았다

친구들과 함께 나는 성당으로 갔다. 이제 순례의 대단원, 순례자 미사가 남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우리를 이 길로 부르시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의문과 의심이 떠올랐다. 미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나는 계속 뾰로통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뜬금없이 가슴 한복판이 따끈해지더니 뭔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눈물은 한 번 시작되니 걷잡을 수 없어져 소리 없는 통곡이 되었다. 가슴 안쪽 어디선가 '이제 다 나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항했다. '말도 안돼. 발목도 부어있고 머리도 아프고 발톱도 아픈데 대체 뭐가 다 나았단 말이야? 내가 원한 건 진짜 기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미사 내내 흘린 눈물이 지금껏 흘려온 눈물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라는 것을.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옳다고 느꼈다. 머리로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미 치유되었다. 이 괴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노 수녀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배경으로 거대한 향로 보타푸메이로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조금은 매캐하고 은은한 향이 성당 안에 가득 퍼졌다. 향로를 끌어올리는 도르래 소리가 힘차고 아름다웠다. 그넷줄에 매달린 향로는 순례자들을 대신해서 춤을 추었다. 문득 가슴이 저려왔다. 누군갈 몹시도 사랑하게 되었을 때처럼 가슴이 아프기도 먹먹하기도 저릿저릿하기도 했다. 나는 아마 지금껏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누군가를 아주 깊이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그것은 신인 것 같기도 했고 나 자신인 것 같기도 했고 신과 하나인 나 자신인 것 같기도 했다.

▲ 다시 만나서 행복해요!

오늘 너를 만날 줄 알았어

미사가 끝난 뒤 사람들은 제대 뒤쪽에 있는 야곱상으로 갔다. 커다란 야곱상은 입구를 향하고 있어 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건 야곱상 뒤통수였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야곱님 뒤통수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야곱상 뒤통수에 주먹을 불끈 쥐며 "당신 때문에 이 고생을 했잖아요!"하고 장난 섞인 원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성당 안은 재회의 장이었다. 헤어졌던 길동무들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는 사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그동안 길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벌써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오래 전 헤어진 친구들을 만나기에 나는 너무 늦었던 거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미사가 끝나고 다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순!" 저만치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온타나스에서 만났던 마샬 할아버지와 디앤 할머니였다! 두 분은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상상도 못한 재회에 반갑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두 분이 너무 많이 우셔서 조금 얼떨떨했다.
"순, 오늘 너를 만날 줄 알았어. 네가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나는 의아했다.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가 보통 한 달 남짓 거리인데 온타나스에서 40일 전에 만났던 분들이 아직 여기 계신다는 것도 놀라웠고 오늘 내가 여기 올 줄 알았다는 말씀도 놀라웠다. 발바닥 인대와 식중독, 지난 며칠 미친듯이 하루 20km 넘게 걸었던 것, 이 모든 것이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오늘 내가 산티아고에 있을 줄은 나조차도 몰랐던 일이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마샬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날 아침 너랑 헤어지고 나서, 산티아고로 오는 내내 우리는 후회했단다. 왜 그때 너와 함께 걷지 않았을까. 단 한 시간, 단 1km라도 너와 함께 걸었다면 좋았을걸. 세찬 비속에서도 느릿느릿 걸으며 환하게 웃던 네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했단다. 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해달라고, 산티아고에서 딱 한 번만 너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그동안 다른 도시들을 여행하다가 내일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산티아고에 들렀어. 어쩌면 네가 와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이건 기적이야. 우리 기도가 이뤄진거야! 하느님은 살아 계셔!"

하느님은 살아 계셔

그제야 나는 이 모든 걸 이해하게 되었다. 두 분과 헤어진 지난 40일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두 분의 기적을 위한 것이었음을. 나는 두 분의 기적을 이루는 데 쓰인 그분의 도구였다. 걷는 동안 드렸던 '평화의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느꼈다. 평화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억울한 마음도 들었고 그 기도가 진짜로 이루어질까봐 걱정스런 마음도 들었다.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게 해달라는 말씀도 싫었고, 그분의 도구가 되는 건 귀찮고 성가신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분의 도구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난 그저 내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뿐이었다. 아프면 앓고, 힘들면 울고,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온 것, 그게 다였다. 억지로 애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나'로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마샬 할아버지, 디앤 할머니를 모시고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유난히 내게 '네가 까미노의 천사냐?'고 물어오곤 했는데, 알고 보니 두 분이 내신 소문이었다. 함께 밥을 먹던 친구들은 뭐 이런 천사가 있느냐며 실색했지만 나는 마음껏 으스대었다. 물 마시는 사람 물병 거꾸로 들어버리기, 하품하는 사람 입에 손가락 넣기, 똥 찍은 막대기로 사람들 찌르기 등 못된 짓만 골라하는 내가 천사일 리 없다며 신부님과 병철씨는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내게 캐나다에 꼭 놀러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언제나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하겠다고도 하셨다. 디앤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려무나. 남자친구가 생기든 결혼을 하게 되든, 아이가 생기든 언제라도 우리집에 오렴. 우리는 언제나 너를 환영하고 우리집은 항상 네게 열려있어."

그 뒤에도 만다라를 함께 그렸던 마르티나, 바르바델로에서 식사를 대접했던 히로 아저씨, 몰리나세카에서 만났던 범희씨를 만났다. 느려도, 이렇게 느려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구나. 행복하다. 어제는 축제 같고 오늘은 선물 같다.

친구들과 함께 세상의 서쪽 끝, 피니스테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피니스테라로 가는 버스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길은 꼬불거리고 버스는 덜컹거려 오랜만에 자동차를 탄 사람들은 멀미를 참느라 얼굴이 노래졌다. 나란히 앉은 신부님 어깨에 토할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가며 가까스로 피니스테라에 닿았다. 짭쪼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이 샛노란 동양인 네 명이 버스에서 내리자 갈매기들은 큰 소리로 수선을 피웠다. "이야, 정말 노란 사람들이다!" 


김순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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