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인수 칼럼]

▲ 사진/한상봉

평생을 사제로 살면서 본당의 주임이나 보좌를 단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아마 없지 싶다. 나도 한번 따져보자. 지금까지의 사제생활 가운데 처음 3년을 강의선, 조성교, 강근신 신부의 보좌로 살았다. 그리고 30년 동안 손가락을 꼽아봐야 차례가 기억날 열서너 명의 보좌와 함께 살았다. 이상한 현상은 내가 보좌 때의 일들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생각이 나는데 보좌와 함께 산 최근의 일들은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주임과 보좌의 관계라는 게 참 묘하다. 신분이나 직위로 따진다면 교구장 주교와 사제처럼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아닌 ‘나도 신부, 너도 신부’인데 직책은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희비가 엇갈리기 십상이다. 때마침 운 좋게(?)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취향이 같거나 요즘 말대로 ‘코드’가 맞으면 친형제나 부모 자식처럼 가깝게 지내고 신이 나지만, 추구하고 지향하는 방향이 엉뚱하거나 사회와 교회를 보는 관점이 다르면 심한 경우 밥도 같이 안 먹는 원수(?)가 되어 하루하루가 괴롭다.

상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교우들 앞에 빤히 드러내는 모습도 꼴불견이다. 부끄럽게 고백하건대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내가 어떤 주임, 어떤 보좌를 만나느냐는 그래서, 인사이동을 앞둔 사제들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하기야 세상이 반쪽이 나도 소신대로만 살겠다는 일념으로 사제가 된 사람에게야 그게 무슨 문제가 되랴마는, 작게는 한 가정으로부터 크고 작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남녀가 처음 만나 부부로 살기까지는 서로 상대방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 게다가 둘의 선택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래도 불과 얼마 못가서 서로 남남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무원이나 교사들은 인사발령을 내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희망하는 근무처를 묻고 가능하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배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간 곳에서도 여건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유권자가 여러 후보 가운데 하나를 뽑아 세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음에 안 들어 욕을 퍼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본당의 주임이나 보좌사제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도로, 또 받아들이는 신자들의 바람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느 날 갑자기 하늘 꼭대기서 낙하산 타고 떨어진 사람이다. 수도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만난 주임과 보좌, 사제와 수도자와 신자들이 찰떡궁합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허황한 꿈인가.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사제 인사이동 절차는 교구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비슷한 것 같다. 교구장이 특수 임무를 맡기려고 점찍어둔 극소수의 사제를 제외하면(이를 테면 해외파견이나 특수사목이라 일컬어지는 직책 등) 하나같이 일방적이다. 간혹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의견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연륜을 쌓은 원로이거나 교구장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대부분의 평범한 본당주임이나 보좌는 아니다. 말도 못하는 네가 바보라고 핀잔을 당한들 그 정도로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불쑥 덤벼드는 사제는 거의 없다.

교구의 모든 사제를 일렬로 세워놓고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함께 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제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묻고 취향이나 소질, 전공 등을 파악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어울리는 사람과 함께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건 매우 어렵겠지만 얼마든지 가능은 한 일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인사권자인 교구장의 여러 임무 가운데 가장 큰 일이 이것 아닐까 싶은데.... 모든 사람 개개인의 희비야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있는 것이지만 특히 우리 가톨릭의 고유한 체제 안에서 사제의 그것은 많은 부분 교구장인 주교에게 달려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고강동 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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