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9]

2008년 6월 15일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향기로운 유칼립투스 숲

오늘의 목적지 몬테 도 고소로 오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어떤 길보다 아름다웠다. 밤새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 전형적인 갈리시아의 아침이다. 유칼립투스와 야생 고사리, 이름 모를 온갖 풀꽃에서 나는 향기가 이른 아침 숲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침 숲에서 나는 향기가 이토록 황홀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평생을 살아온 게 안타까웠다.

잠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새벽 네 시부터 일어나 부산했다. 모두 들뜬 기색이 역력하다. 잠이 올 턱이 없다. 차를 마시러 식당으로 내려가니 브라질에서 온 언니 하나가 '산티아고는 대체 뭐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다들 그 언니에게 흡족한 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있는 답을 내놓는다 해도 그 답은 가짜일 게 분명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마리오 아저씨랑 같이 알베르게를 나섰다. 숲 속에서 풍겨오는 아침 냄새를 만끽하며 아저씨와 나는 기적에 관해 얘기했다. 마리오 아저씨는 기적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두 달이 훌쩍 넘도록 매일 10km씩, 이렇게 느리게 걸어온 네가 바로 기적이야. 너는 어떤 사내보다도 강인한 소녀란다."
그래, 나는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로지 나 뿐인지도 몰랐다.

마리오 아저씨가 앞서가시고 나자 문득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밑도 끝도 없는 졸음이었다. 정신은 이미 어딘가 다른 별로 떠나갔고 발만 습관적으로 휘청휘청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고 걸어도 이렇게 졸린 적은 없었다. 10km 정도를 그렇게 걸었나보다. 작은 마을에서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볼을 꼬집어가며 다시 길로 나섰다. 머리가 몽롱하고 눈앞이 가물가물, 여태껏 겪어온 모든 것이 꿈속의 일인 것만 같다. 나는 지금 산티아고로 가는 게 아니라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위에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포근하고 따뜻한 할머니 품속에 쓰러지고 싶다, 오로지 그 생각만 났다.

천국에나 있을 법한, 그림같이 파아란 밀밭이 나타났다. 이제 이 아름다운 길도 막바지구나. 처음 걷기 시작하던 나바라에서 연두색으로 자라나고 있던 이파리들이 이젠 묵직한 이삭을 매달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이 길을 걷는 동안 밀이 이삭을 키워낸 것처럼 나한테도 열매가 맺혔을까? 유칼립투스 잎사귀 몇 개를 주워 책 속에 끼워 넣었다. 는개비 사이로 지금껏 걸어온 모든 길이 떠오르는 짧은 길들이 이어진다. 오르테가의 숲길, 우테르가의 절벽길, 오래된 다리와 언덕들….

걷는 동안 밀이 다 자라 이삭을 맺었다

뿌연 안개와 향기로운 유칼립투스 숲을 헤치고 몬테 도 고소에 닿았다. 함께 출발한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산티아고를 향해 나아갔지만 나는 오늘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산티아고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알베르게를 찾다가 어느 벤취에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 돌렸다. 저만치 언덕 아래로 제법 커다란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저게 산티아고?

그제서야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몬테 도 고소에서 산티아고까지 5km 남짓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 훤히 보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산티아고에서 어떤 커다란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산티아고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지금 산티아고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내일 새벽에 들어갈 것인가. 혹 지금 산티아고에 서둘러 가고 싶은 이유가 먼저 도착해 있을 친구들 때문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무리 친구들이 그리워도 사람을 따라 내 순례를 맺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는 '오늘은 여기까지가 한계야.'하고 가슴은 '지금 당장 달려가지 않고 뭐해!'하고 소리쳤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30분이 넘도록 나무 등걸에 기대 앉아 생각에 잠겼다.

'순진, 무엇을 망설이고 있니? 산티아고로 가는 게 왜 두려운 거니? 네가 찾던 게 거기 없을까봐? 그럼 어때! 친구들을 따라가는 것 같아서? 그럼 어때! 저길 봐, 네가 그토록 닿고 싶어 했던 곳이야. 8년 전부터 꿈에 그리던 바로 그곳이라고. 생장에서부터가 아니야, 8년 전 어느 빈 강의실에서부터야. 8년하고도 70일 걸려 도착한 거야. 영영 꿈만 꾸다 말 것 같았던 이곳, 산티아고에!'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지금껏 평생 좋은 기회와 인연 앞에서 나는 항상 주저하고 망설여왔다. 한 번도 스스로 당당해보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삶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아프니까, 모자라니까,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으니까, 사랑받지 못하니까, 온갖 결격 사유들이 내 발을 내 몸을 내 혀를 옭아매왔다. 하지만 산티아고에 들어서는 일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해방되고 싶었다. 세상의 당당한 사람들과 비교해 스스로를 얽어놓은 사슬에서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산티아고는 지난 8년간 그리고 이 길에서 보낸 70일간 내게 꿈의 도시, 마법의 도시, 기적의 도시였다. 나는 내 기쁨과 평화와 기적을 향해 달려가야 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이미 풀릴대로 풀려 자꾸 헛디디는 다리를 끌고 구르듯이 언덕을 내려갔다. 걸음은 점점 더 가빠지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산티아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별이 내리는 들판, 산티아고! 도시 초입의 여행안내소에서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받고 나와 춤을 추었다. 배낭을 메고 트레킹폴을 쥐고 "야호!" 소리 지르며 잔디밭에 엎어져 굴렀다. 내가 왔다! 밤새도록 멎지 않는 통증도, 배고픔도 추위도, 외로움도 절망도, 나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해낸 거다. 장하다, 정말 장해 순진!

시 외곽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성당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내가 예상보다 이삼일이나 일찍 도착해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신부님은 저만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와 나를 안아주셨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하루 20km씩 걸었다는 내 얘기에 사람들은 "이제 다 나은 거야! 기적이 일어난 거라고!"하며 기뻐했다. 온종일 잠에 취해 발만 움직였는데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산티아고였다. 그러고 보면 내 오른발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데 내 의식만 '못해!'하면서 오른발을 가로막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과 함께 광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성당을 올려다보았다. 사진에서, 그림에서 숱하게 보아온 산티아고 성당이다. 눈앞에 두고도 믿기지 않았다. 광장에서 아침에 헤어진 마리오 아저씨를 만났다. 난 오늘 여기까지 올 계획도 없었고 사람들한테도 절대 오늘은 산티아고까지 못간다고 말했는데 역시, 끝까지 내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
"네, 다 포기했어요. 이제 저를 가져다 죽을 쑤시든 밥을 하시든 알아서 하십시오!"
걷는 동안 단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음을, 이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함께'는 앞으로도 쭉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내 곁에서 함께 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오늘은 날 위한 축제였다. 온 동네 가로등이 나를 위해 켜진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와인이 나를 위한 축배 같고 세상 모든 음악이 나를 위한 연주 같았다. 친구들의 떠들썩한 환영을 받으며 중국 식당에서 만찬을 나눴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려 밤거리를 두 시간이나 헤맸지만 그마저도 행복했다.

순진, 여기까지 최선을 다해준 너, 고맙고 장하다. 산티아고에 온 걸 환영해!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김순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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