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2005년

자유의 이중성

‘자유’라는 주제를 아주 설득력 있게 말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쇼생크탈출이란 영화죠. 주인공 앤디는 누명을 쓰고 감옥 ‘쇼생크’에 갇힌 존재입니다. 그는 19년 동안 한 번도 자유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앤디의 동료인 노인 죄수 브룩스는 앤디보다 3배 가까운 세월 동안 교도소에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사회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출옥 후에도 "옛날 형무소 가기 전에 가끔 차를 구경했으나 나와 보니 세상 천지에 자동차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죠.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형무소로 다시 돌아가기 범죄를 시도하다 결국 거주하는 집 대들보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Brooks was here" 라는 문구를 주머니칼로 새기고 목메 자살합니다. 그는 구속에 오히려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자유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지도 모르죠.

어려서부터 줄에 묶여 자란 코끼리는 그 줄을 끊을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어져도 자신은 줄을 끊지 못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 결국 줄을 끊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화 속의 브룩스는 자유를 주어도 과거의 줄을 끊지 못하는 이 코끼리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앤디와 코끼리의 일화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유의 이율배반성입니다. 자유는 해방과 구속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는 거죠.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 자유는 해방일 수 있지만, 판단력과 실천의 힘이 부족한 사람에게 자유는 오히려 구속일 수 있다는 거예요. 앤디와 줄에 묶여 자란 코끼리에게 자유는 구속이었던 셈이죠.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1900~1980)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수백만의 독일 사람들이 그들 선조들이 자유를 위하여 싸운 것과 같은 열성으로 자유를 포기하였으며,자유를 찾는 대신 그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찾았다." 라는 구절로 자유의 양면적 의미를 말합니다.

나치즘을 지지한 대중들의 심리를 파헤치면서 에리히 프롬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본유적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떠올랐던 거죠.『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바로 이 의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죠.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는데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와 '~를 향한 자유(freedom to ~)'가 그것입니다. 억압적 권위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는 자유의 신장과 개성이라는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독과 불안이라는 짐도 부여했습니다. 이 소극적 자유가 가져다주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철한 이성과 행동력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한 대중들은 파시즘에 몰입하여 고독과 불안을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에리히 프롬의 분석입니다. 독일에서 나치가 발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죠. 한 마디로 대중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짐스런 자유를 파시스트들에게 자발적으로 양도했다는 것입니다.

합리성이 결여된 애국심은 악의 미덕

‘파시즘’하면 어떤 시각적 이미지가 떠오를까요. 무아경에 빠진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들은 탁월한 언변으로 군중들을 사로잡습니다. 대중들은 그들의 열변에 감정적으로 몰입합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연설이 끝나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젊은이들이 일사불란하게 행진을 합니다. 무엇엔가 도취된 대중들의 환호는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열광은 이내 폭력적 에너지로 변화하여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박해로 이어집니다. 말없는 군중들의 무언의 동의 속에서 극렬분자들에 의해 테러가 자행됩니다. 비이성적인 것에의 집단적 도취와 소수자에 대한 박해, 이것이 파시즘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지요.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가 보여주었던 집단적 열기와 ‘황우석 사태’에 보여주었던 대중들의 행동, 그리고 얼마 전 2PM 의 박재범군에게 보여주었던 일부 네티즌들의 행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애국심이라는 감정에 바탕을 두었던 대중들의 집단적 광기에서 촉발된 행동이라는 거죠. 거기엔 진지한 이성적 성찰이나 이념적 전제도 없습니다. 있다면 보편성을 상실한 ‘애국주의’가 있다고 할까요. 심판이 대한민국 축구팀에게 유리한, 그러나 불한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한 네티즌의 지적에 입에 담지 못할 소위 ‘악플’을 다는 네티즌들의 행동, ‘대한민국’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벌떼처럼 한 연예인을 무차별하게 공격한 네티즌들의 행동도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는 보편적 이성보다 국익을 우위에 두는 태도입니다. 인종적 우생학을 내세워 대량학살을 낳았던 게르만 민족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런 비이성적인 애국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런 비이성적 애국주의를 경고하는 말이 오스카 와일드의 ‘합리성이 결여된 애국심은 바로 악의 미덕일뿐이다.’라는 말이 아닐까요. 제국주의는 바로 자국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고려하는 악의 미덕일 뿐이겠지요.

자유주의의 실패 위에 등장하는 파시즘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언론 매체에 수없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이는 파시즘이라는 말에 객관적으로 합의된 학문적, 역사적 정의가 존재한 적은 없었죠. 2004년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된 로버트 팩스턴의 저서 『파시즘』은 20세기 정치의 가장 큰 논란거리였던 파시즘을 다루고 있는 의미 있는 저작물로 평가받고 있는 책입니다.

팩스턴은 파시즘이 기존의 다른 정치 이념처럼 어떤 주의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시스트들이 내세우는 강령 역시 일관성이 없이 들쭉날쭉함을 강조합니다. 한 마디로 파시즘을 쉽게 정의할 수 없다는 거죠. 이에 팩스턴은 과거에 파시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자고 제안합니다. 먼저 파시즘을 정의하고 그 정의에 맞는 정치체제를 찾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으로 알려진 정치체제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거기에서 파시즘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귀납적 성찰을 얻자는 것이죠.

팩스턴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파시즘이 특정한 철학적 기반과 뚜렷한 이념적 목표를 지닌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열정적인 대중 운동'을 바탕으로 했을 때만 가능한 정치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대중운동을 활성화합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나 프랑코 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 장악 후에는 오히려 대중운동을 말살했죠. 팩스턴은 이런 정권은 '전통적 독재', 혹은 '폭정'일 뿐이지 파시즘 정권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2차세계대전 때의 일본 정권 역시 열정적인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운동’이 아니라 위에서 군국주의 체제를 강요한 것에 불과했다고도 말합니다.

저자는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허약하거나 실패한 자유주의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자유가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는 곳에서 파시즘이 출현한다는 에리히 프롬의 견해와도 흡사한 대목이지요. 그는 “파시즘이 암실에서 나와 공적인 무대로 쉽게 진출했던 곳은 기존정부의 기능이 형편없거나 아예 전무했던 곳”이라고 지적합니다.

1차세계대전은 파시즘이 탄생할 수 있는 문화‧사회‧정치적 기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현실 앞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고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보는 계층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쇠락에 대한 대중들의 두려움도 클 수밖에 없었겠구요. 파시스트들은 이런 대중들의 불만, 분노, 두려움 등을 노린 거죠. 민족의 영광을 꾀하자는 탁월한 언변으로 대중들의 유토피아를 상징적으로 조작하고 대중들의 에너지를 강력한 리더십으로 결집ㄹ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회심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행동이 집단과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몰락시킬 수도 있다는 데에 따르는 두려움, 필요할 경우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공동체를 더 긴밀히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 국가 지도자에 대한 갈망, 집단을 위해 폭력을 찬미하는 태도‧‧‧ 바로 이런 정서적 요소들이 파시즘적 열정을 구성한다고 팩스턴은 주장합니다.

파시즘은 자유주의의 무능을 숙주로 삼고 사회주의에 대한 불안을 먹이로 삼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나 제3세계의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하기 이전의 체제라는 점에서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파시즘 체제일까?

2009년 7월 한 시민단체에서 어떤 교수가 우리 사회를 파시즘 초기라고 규정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한국사회를 과연 파시즘 체계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에 학자들이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교수는 "결국 경제 공황 속에서 자유주의 정권들의 경제 위기 극복 능력이 무능했고, 그것에 따라서 첨예한 계급 갈등이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한국도 비슷하다. 민생의 위기와 양극화가 바로 파시즘이 나오게 된 계기라고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유주의 정권의 무능, 사회적 갈등의 첨예화라는 점에서 우리사회도 유럽의 파시즘이 등장한 배경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또 조심스럽게 우리 사회가 파시즘 사회로 접어들 수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올해 하반기에 U자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L자형 패턴(장기적 불황)을 취하는 경우와 대다수 국민이 탈정치화되어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몰되는 경우, 유럽과는 다른 새로운 파시즘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특히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대 청년층의 보수화는 우리 사회의 파시즘화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20대 청년층의 경우 소비자본주의 아래서 풍족하게 자랐지만 경제 불황으로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조건이 소멸하면서 좌절감과 분노, 불안에 빠지게 되었고, 이런 좌절과 불안이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전화되면서 파시즘의 한 축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신문의 논설위원은 ‘지금 정권이 자유, 민주, 평화주의를 배격하는 것 같지는 않다. 국수주의를 표방하고 폭력적 독재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다수 여당이 소수 야당에 끌려가고 있으니 일당독재라고는 할 수 없다. 촛불시위가 석 달을 이어가고 국회의원이 대통령 앞에서 막욕을 해도 처벌받지 않으니 정치적 자유가 억압됐다고 할 수도 없다.“며 파시즘 논의가 정략에 이용될 수도 있음을 경계합니다.

어쨌거나 파시즘은 비이성적 광기의 산물이요, 대중들의 불만, 분노, 두려움 위에 세워진 일관성이 없는 신념에 불과합니다. 이의 도래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이성적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비판적 여론이 건전하게 작동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의 적절한 분배를 통한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는 작업 또한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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