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최우혁]

아침이 깨어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계절이다. 그나마 얼굴을 비치는 햇살도 점심이 지났다 싶으면 꼬리를 감춘다. 따스한 빛과 열이 그리운 계절이다. 점점 깊어지는 밤에 깨어있으며 성탄을 기다린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러면 스러지던 해가 다시 제 기운을 되찾고 얼어붙은 세상 한가운데서 새로운 위안으로 솟아오를 것이다. 이런 기다림이 나 혼자만의 것일까 생각하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으니 과달루페의 성모님이다.

출산을 준비하는 만삭의 성모

▲과달루페의 성모
멕시코 시티 인근의 테페약 언덕에서 효성이 극진했던 후안 디에고에게 1531년 12월 9일 만삭의 모습으로 처음 발현했다는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멕시코에서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신앙을 상징하는 어머니로 사랑 받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안에게 나타난 성모님은 인디언의 언어인 나후아틀어로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고 말했단다.

사흘 후 성모님을 다시 만난 후안은 성모님으로부터 발현의 징표인 장미 다발을 받아서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에 싸서 그 지역의 주교에게 가져왔는데 장미를 보이려는 순간 그의 외투에는 그가 만났던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나타났다. 이 성화에 새겨진 성모 마리아는 만삭의 모습으로 키는 1m 45cm이고 피부색은 인디언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며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선교한 가톨릭교회를 표시하고 머리에서 발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외투는 밝은 청록색으로 거룩함을 뜻한다. 500여 년이 지나도록 빛조차 바래지 않은 이 과달루페의 성모님을 이해하려면 1519년부터 1521년까지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과정을 살펴보아야한다.

슬픔의 밤, 몰살당한 아즈텍인들을 위해

스페인의 정복자 페르디난도 코르테즈가 부유한 인디언 문명에 관한 소문을 따라 아즈텍의 테노치티틀란에 등장한 것은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가 몰락하던 1520년이었다. 그는 아메리카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말과 개, 그리고 대포와 600 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착했다. 턱수염을 가진 그들의 백인신 케찰코아틀이 동쪽에서 돌아올 것이라는 전승을 믿던 황제는 수염을 기른 코루테즈를 신으로 생각하고 환영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반대하던 아즈텍의 부족동맹은 스페인의 침략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곧 원주민들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즈텍 부족들이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스페인군을 거의 물리칠 무렵, 아즈텍군의 지도자가 갑자기 천연두로 쓰러져 사망하고 병사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이 천연두가 번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침략자들과 함께 상륙한 또 다른 정복자 전염병의 공격이었다.

천연두, 홍역은 물론 감기 바이러스도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 침략자들이 함께 가져온 병이었다. 아즈텍군은 공격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고 전멸 직전의 스페인군은 안전하게 퇴각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어 전염병의 원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원주민들은 이를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해서 침략군과 맞서 싸울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테노치티틀란로 돌아온 코르테즈은 “슬픔의 밤”으로 상징되는 날, 15만 명에 이르는 인디언 대학살을 통해 아즈텍 문화를 송두리째 뿌리뽑고 멕시코를 건설하였다. 콜럼버스가 처음 식민지를 건설한 산토도밍고에서도 정복자들의 잔임함과 전염병의 창궐로 원주민이 멸족했다. 2천만 이상의 인구가 있었던 이 지역에서는 정복이 끝난지 50년이 채 안되어 1/10로 인구가 감소했고 100년 뒤에는 1/20 감소했다고한다. 잉카제국이 있던 페루 역시 정복 후 백년이 지났을때 인구는 1/10로 감소했고 더불어 아메리카의 아즈텍-잉카 문명은 신화의 자리로 사라지고 말았다.

전쟁과 폭력의 한가운데서 생명을 받아들여

여러 세기가 지난 후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가톨릭 교회가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의 구성원들이 범한 과오들 - 교회 분열, 유다인과 타종교인에 대한 박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원주민들에 대한 폭력 등 - 에 대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다. 또한 2002년 7월 31일, 로마에서 천이백만의 신자들과 함께 후안 디에고를 성인으로 시성 했으며, 다음해 성 후안 디에고 (12월 9일)와 과달루페의 성모 (12월 12일) 발현 축일을 로마 전례력에 기재하였다.

과달루페의 성모발현은 아즈텍의 인디언 대학살이 발생한 지 10년만에 이루어졌다. 성모의 발현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아즈텍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한 정복자인 스페인과 정복당한 인디언의 피를 함께 나누어 받은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종족 메스티조의 등장을 알리는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인디언 여성의 얼굴로 나타난 그의 눈 안에는 일어난 사건과 일어나게 될 사건, 즉 아즈텍인들의 소멸과 새로운 종족의 등장, 그에서 비롯되는 비통과 연민, 염려와 위안이 교차한다. 곧 해산을 앞둔 만삭의 몸으로, 눈을 아래고 내려 뜨고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다.

이 과달루페에 나타난 성모의 얼굴을 바라보면 고통의 세월을 말없이 살다간 많은 여성들이 겹쳐져서 떠오른다. 남편을 살해한 다윗 왕의 아들을 임신한 밧세바의 얼굴에서, 고대 로마시의 남자들에게 겁탈되어가는 산 위의 도시 사비나의 울부짖는 여인들, 일본군에 끌려가서 그 강간의 현장에서 만삭이 된 모습으로 사진에 남은 조선의 이름 모를 한 위안부, 보스니아 전쟁에서 침략군에 겁탈당해 임신한 아이들을 낳기로 결심했다는 여성 수도자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도 그 아이를 받아들이는 말 못할 사연을 가진 수많은 여성들 ….

전쟁과 폭력의 한가운데서 생명을 받아들여 그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그 여성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이 인디언 여성 마리아의 얼굴에 배어있다. 동족의 남자들이 몰살당하고 정복자의 강탈로 수태한 여성의 굴욕과 고통은 넘치고도 남는다. 인류의 모든 전쟁에서 여성들은 이렇게 정복되는 역사를 되풀이 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 여성들이 받아들인 생명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엄청난 역설이다.

이 역설을 살아가는 얼굴에서 폭력의 한가운데서 생명을 지키는 비장한 여성의 힘을 느낀다. 여성들은 짓밟힘을 통해서도 새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들은 이제까지의 고통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 바뀔 것이란 희망을 안고 태어난다, 비록 그 아이들이 또 다른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지언정. 생명을 키워내는 이 여성들의 가능성에 바로 희망의 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현장인 독일의 아우슈비츠에서도 200여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는 기록을 본적이 있다.

정복당하지 않는 여성의 힘

그리고 이 역설은 그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밧세바가 낳은 그 아이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었고, 메시아로 온 예수는 그의 자손이다. 여성들의 생산력은 단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을 넘어선다. 아이를 지키고 키워내는 여성들의 힘에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힘들이 숨어있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역사는 태어나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난다. 어머니가 된 여성은 닥쳐오는 현실에 적응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지난 시간의 상처들 역시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 치유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강간과 폭력으로 얼룩진 개인사는 역사의 한 부분이 되고 고통을 이겨낸 여성들은 역사적인 모델이 되기도 한다.

과달루페 성모의 얼굴에는 이렇듯 정복당하지 않는 여성의 힘이 배어난다. 말없음이 굴종이나 맹목적 순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나자렛의 마리아 (루가 2,19. 51) 는 자신이 겪은 그 모든 사건을 곱씹으면서 새로운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교회가 그에게 첫 자리를 드리는 것은 그가 예수의 생모일 뿐 아니라, 그가 겪은 역사가 곧 교회의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달루페의 성모상 앞에는 위로 받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이 오늘날에도 넘쳐난다. 그가 넘어선 고통을 알기에 그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되고 그 오욕의 역사에서 태어난 메스티조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만삭의 그 어머니에게서 찾는다.

▲1309 이태리 볼로냐의 마리아의 종 수도회 성당의 프레스코화: 출산을 기다리는 성모
▲1370-1376 이태리 비첸자: 출산을 기다리는 성모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또다시 기다리는 계절이다. 추운 계절에 빈손 빈 마음으로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우리의 자리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태어날 아기를 또다시 기다린다. 만삭의 성모님이 이번에는 어떤 기쁨의 아이를 우리에게 낳아줄지…? 또다시 희망으로 오는 그 아이를 받아 키우려는 기대로 빈 마음을 다듬어 본다. 이미 충분히 가난한 우리의 살림에 아기와 함께 자라날 새로운 빛도 함께 받아 안아야 근근이 겨울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얼어붙은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후후 불며 태어날 아이와 다시 시작해볼 작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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