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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가난한 이들의 성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건축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성을 위해 아시시를 방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 (Gregorio IX)가 첫 삽을 뜸으로써 시작되었다. 대성당은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되어 있다. 지하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이 있고, 지상 2층에는 위 성당과 아래 성당 그리고 수도원 건물이 위치해있다. 13-14세기의 유명한 화가 죠토 (Giotto), 치마부에 (Cimabue), 토리티 (Jacopo Torriti),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Martini), 피에트로 로렌제티 (Pietro Lorenzetti)가 대성당 내부 벽면을 화폭 삼아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풀어놓았다. 두 분의 생애를 다룬 프레스코 벽화는 ‘가난한 이들의 성서’ 바로 그 자체이다. 대성당은 생생한 색깔과 웅장한 건축학적 움직임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마니피캇을 세기를 걸쳐 쏟아내고 있다.

 

   
대성당 정면; 대성당의 운해


007 작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워낙 순례객들이 많아 몰리는 곳이라 성당 입구에 복장착용 불량자 출입금지와 촬영금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스피커에서는 연신 ‘조용’이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사진 촬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안내원이 성당을 수시로 순찰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생생하게 펼쳐놓은 프레스코화 촬영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한다. 내가 망을 보는 사이 베드로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절망 속에 싹튼 희망

청운의 꿈을 안고 페루지아 (Perugia) 전쟁터에 나갔던 청년 프란치스코는 포로로 잡혀 일 년간 수용소에서 지냈다.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그 날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프란치스코의 심정을 절절하게 전해주는 것이 바로 대성당 마당 앞에 있는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프란치스코.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떨어질 듯 푹 숙인 고개, 근육의 모든 실 날이 풀린 듯 축 처진 어깨, 땅이 꺼져라 내뱉는 한 숨 소리. 너무도 환상적인 석양은 깊은 절망에 빠진 프란치스코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다시금 희망을 불어넣는다. 

 

   
 

 

   
프란치스코의 귀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단단한 외벽은 로마 양식이고 안쪽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다. 대성당과 함께 솟아오른 수도원에는 1230년부터 수사들이 기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출신인 교황 시스토 4세 (Sisto IV)가 건축학적으로 복합적인 수도원 건물의 많은 부분을 마무리하였다. 시스토 교황이 1474-1476년에 상층 회랑의 복도를 건축하도록 하였다.

1228년 3월 2일 엘리아 봄바로네 (Elia Bombarone) 수사는 시모네 디 풀치아렐로 (Simone Pucciarello)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헌납한 땅을 기증받았다. 엘리아 수사는 ‘지옥의 언덕’ - 당시 이곳에서 범죄자들을 단죄하였던 것에 유래한 명칭- 이라고 불렸던 이곳에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신을 안치할 성당을 건축했다. 오늘날 이곳은 도시 전체의 파노라마를 상큼하게 바꿔 놓은 대성전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천국의 언덕’ 이라고 불린다.

1228년 7월 17일, 글라라 성당 - 그 당시 성 그레고리오 9세 성당 -에서 치러질 성 프란치스코의 시성을 앞두고 프란치스코의 절친한 친구인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대성당의 첫 주춧돌을 놓았다. 건축을 시작한 2년 후에 내부 공사가 마무리 되어 1230년 5월 25일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신이 이곳에 안치되었다. 엘리아 수사는 대성당 전체 분위기를 프란치스코 영성으로 가득 채웠다. 
 

   
대성당 - 아래 성당 제대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품

아래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몇몇 유품이 비치되어 있다. 예를 들면, 1223년 11월 29일 교황 오노리오 3세에 의해 인준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칙에 관한 자료. 이는 수도회의 대헌장과 같은 것이다. 신임이 두터운 동료이자 고해신부인 레오네 수사를 축복하는 글이 적혀 있는 성인의 자필 원고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주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보호하시길. 당신에게 그분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자비를 베푸시길. 당신에게 그분의 시선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길 빕니다.”

가난한 이의 무덤

아래 성당 지하에 있는 크립타 (Cripta)에는 1230년 5월 25일 이곳에 모셔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너무도 깊숙이 감춰져서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무덤이 1818년 52일 동안의 작업을 통해 드러나고 성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파스쿠알레 벨리 (Pasquale Belli)가 두 성당 아래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넓은 크립타를 건축하였다. 1927-1930년에 우고 타르키 (Ugo Trachi)가 돌로 둘러친 현재의 클립타를 완성하였다. 1932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주위에 초기 추종자들 - 레오네 (Leone), 루피노 (Rufino), 마쎄오 (Masseo), 안젤로 (Angelo) 수사 - 의 시신을 안치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지하 성당은 위쪽 성당의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성인의 무덤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엄한 기운과 참배객들의 진지함에 압도되어 그 누구도 감히 카메라를 꺼낼 수 없다. 베드로도 여러 번 촬영을 시도했는데 엄숙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고, 내부가 너무 어두워서 삼각대 없이는 도저히 상이 맺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순례객들이 드문 시기인 2월, 1박 2일 아시시로 순례를 떠났다. 도착한 다음날은 하루 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려 아시시는 거의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날은 마음먹고 지하 무덤 성당에 갔더니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었다. 기회는 이 때다 하고 얼른 카메라를 꺼내어 몇 번의 심 호흡 끝에 그 장엄한 장면을 프레임 안으로 옮겨다 놓았다. 

지진으로 인한 복구 작업

움브리아 (Umbria) 지역에서 발생한 1997년 9월 26일의 지진으로 위쪽 성당의 제대 쪽과 첫 번째 종탑이 무너져 내렸다. 이 지진은 대성당에 심한 손상을 입혔는데 위쪽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가 타격을 받았다. 문화재 관리부와 아시시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협력하여 대대적인 보수 공사에 돌입하였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한편으로는 무너진 부분을 복구하고 강화하기 위해 지진 방지 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치마부에와 토리티의 작품인 천정 프레스코화 조각들을 복원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씨토회 수사들의 복원 작업은 벽면 공사는 물론 프레스코화 복원에 있어서 볼 때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아시시, 특별히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문화 예술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뜻 깊은 곳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 영성을 이어받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Giovanni Paolo II)는 세계평화 모임을 이곳 아시시에서 개최하였다. 이 모임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돌며 진행되고 있다.

거창한 세계평화 모임이 아니더라고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이 이곳을 수시로 찾는다. 아빠와 함께 이곳을 방문한 어린 아이가 평화를 기원하는 글을 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에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대성당 광장 - 세계평화 모임

태양의 찬가를 부르는 젊은이들

아시시는 연중 내내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탈리아에 2년 머물면서 총 열 번을 방문했건만 매번 살갑게 우리 부부를 맞이하는 아시시의 환대가 너무도 고맙다.

베드로와 내가 아시시를 방문한 어느 초여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광장을 바라다볼 수 있는 위쪽 성당 담벼락에 젊은이 몇몇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귓가를 살랑거리는 바람을 벗 삼아 바이올린 선율에 맞추어 편안하고 한가롭게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 프란치스코 성인이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나 그들과 함께 태양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젊은이들의 태양의 찬가

/최금자 김용길 20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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