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용산참사 현장에 서 있던 경찰차량. 주변이 온통 참사 흔적으로 자욱하다. (사진/한상봉)

 

차가운 겨울바람이 분다.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이 불안하기도 하고 처량해 보이기조차 하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한국사회는 마치 안과 밖이 철저히 분리된 채 소통이 불가능한 냉동 창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회가 육중한 쇠문이 닫히면 실낱 같은 빛마저 들어올 틈이 없이 차단당하고 모든 생명이 한순간에 얼어붙는 냉동 창고 같다면 너무 과잉된 감정일까?

한국사회의 2009년이라는 시간은 결국 용산으로 시작하여 용산으로 끝을 맺는다.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고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가고 절규하며 쓰러진 그날이 이제 1년이라는 긴 세월로 다가온다. 매섭게 춥던 1월의 어느 날 저녁, 가슴 두근거리며 용산으로 처음 가던 밤, 남일당 앞은 아직 돌이 굴러다니고 불엔 탄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으며 나는 돌아가신 영혼들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올리며 “제발 다시는 이런 더러운 세상에 태어나지 마시라”라고 했을 뿐이었다. 매일 공권력과 전쟁이 벌어지고 문정현 신부님과 오두희 누이가 남일당 골목에 거처를 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수의 사람들이 꺼져가는 불씨를 부둥켜 안고 눈물겹게 살려나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너무 세상이 기가차고 절망스러워서 아예 귀 막고 싶었다. 오체투지를 하고 돌아 온 작은 문 신부님이 쓰러지고 죽음의 문턱에 서있을 때 분노가 없는 세상이 미워졌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불에 타서 돌아가신 분들처럼 살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미친 듯 질주하며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거리의 또 다른 한편에서 캄캄한 저주의 땅처럼 포위당한 남일당은 죽음과 절망과 무력함과 속죄양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고통과 죽음과 수모와 조롱 앞에서도 다시 일어선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들 가슴속에 절절히 살아남아 더 활활 타올라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할 공간이었다.

이 시대의 용산은 인간보다 물질이 앞선 불행한 시대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속도, 성장, 개발, 돈, 명품, 일등을 하기 위해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린다. 어쩌다 잠시 머뭇거리지만 멈춤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달려야만 살 수 있기에 말이다. 어느새 우리도 닮아 버렸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니체가 말했다. ‘괴물을 없애려다 괴물을 닮아간다’고. 우리 역시 자본을 삶의 유일한 가치로 삼고 사는 괴물이 되었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유일신인 맘몬(Mammon, 재물신)은 어느새 사람을 확실한 포로로 만들었다. 그것은 인간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편을 나누고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생각하는' 인간의 영혼마저도 삼켜 버렸다. 그분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고 단순하게 이야기 했다. 그 단순함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조금씩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 요리해서 받아들일 뿐이다. 타인을 누르고, 권력을 이용해 맘몬으로 무장한 세력이 기세를 부리며 맘몬이외에 모든 것을 공격한다. 우리들의 삶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의 희망은 없다.

겨울의 길목에서 한해를 돌아본다. 봄이 지나가는 오월의 어느 날, 택배 노동자를 복직시키라고 요구하며 목숨을 던진 한 노동자의 영혼 앞에서, 긴 여름, 폭력과 공포에서 고립되어 눈물을 삼켜야 했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고통의 시간에서, 이 시간에도 천막 안에서 몇 년동안 이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자들의 불안한 잠자리에서, 무소불위 권력의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벌어진 약속파기에 굴욕당하지 않고 기차를 세워버린 어느 철도 노동자의 외침에서도, 가장 힘들고 외로운 절망의 남일당 현장에서 흔들리며 타오르는 그분을 기다리는 대림의 작은 빛 안에서도 세상에 맞서서 싸우는 모든 이가 서로 위로받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섰으면 좋겠다. 맘몬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다’라고 하는 외침의 목소리가 세상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한상욱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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