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32]

사진/한상봉

성경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사도 2,21; 로마 10,13; 요엘 2,32)고 말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요한 20,31)는 목적으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름’이 무엇이기에 부르는 이에게 구원과 생명이 베풀어지는가?

구약성경에서 ‘이름’은 어떤 사람의 신원을 확인시켜주는 단순한 표식이나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그런 이름이 붙여진 자의 본질적 성격을 나타내주며, 이름과 이름을 가진 이의 현존은 분리되지 않는다. 간교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창세 32,38)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내지 본질을 나타내준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불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권한과 보호 아래 있다는 뜻이며, 그의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야훼의 소유물이며, 따라서 그의 권세와 보호 아래 있다는 뜻이다. 멀리 계신 하느님을 가깝게 체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름이다.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이 지상에 계신 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은 사실상 동일하다.(1열왕 8,27-30) 이름과 존재는 같기에, 하느님의 이름만으로도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고, 축복과 감사와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저 ‘이름’이라는 말만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한다.(레위 24,11)

신약성경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거기서도 이름은 인격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가 낳을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지으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태 1,21) 이처럼 이름과 그 이름의 내용은 직결되어 있다. 이름이 바뀌면 성격이나 신분상의 변화도 뒤따른다고 본다. 시몬이 신앙고백을 한 뒤에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고, 사울로가 이방세계에 대한 선교의 소명을 받은 뒤에는 로마식 이름인 바오로로 바꾼 것이 그 예이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걷게 하자, 산헤드린의 관원들이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사도 4,7)라고 묻자 베드로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된 것”이라고 답한다. 예수의 본질과 능력이 그 이름 속에 온전히 담겨있다고 보기에 쓸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예언자의 이름으로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의 이름으로 옳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이는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는다”(마태 10,40-42;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름’이라는 말을 빼고 번역해 놓았다)는 말도 예언자의 이름, 옳은 자의 이름 속에 그이의 본질이 들어있고, 이름이 그이의 인격과 사실상 동의어일 때 가능해지는 표현이다. 이름은 그이의 본질과 같다. 흔히 생각을 먼저 한 뒤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때 말은 생각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이름은 인격의 표현이며, 인격과 동일하다.

하느님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 이름을 통해서다. 그렇게 드러난 하느님 이름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성경에서는 육신이 되신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하느님의 이름과 거의 대등하게 사용한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은(요한 1,12) 하느님의 이름을 신뢰하는 것이고(시 33,21),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창세 13,4)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대등하다.(사도 9,14) 구약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 자신과 동일한 것처럼, 신약에서 예수의 이름과 예수 자신은 동의어이다.(요한 1,12; 2,23) 그 이름이 인격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3,18에서는 “그(예수)를 믿는다”와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문구가 한꺼번에 나온다. (공동번역성서는 적당히 얼버무려 이름이라는 낱말을 뺐지만) 이것은 예수와 예수의 이름이 같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예수가 보여준 언행의 의미를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 한 마디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를 받아들여 예수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는 표현도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이미 예수와 결합되어 있으며, 예수 안에 뿌리박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해서 촉발되고 그의 성품과 일치하는 기도를 말한다. ‘내가 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예수에 의해’ 그렇게 하게 된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 어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 소유자의 본질 안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 특히 개신교인은 기도 끝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표현을 쓴다. 가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같은 말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통하여 빈다는 것은 예수의 본질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불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정토불교에서는 자비로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극락에 태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이를 믿는 불자들은 그래서 “나무아미타불”(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합니다)이라 염불한다. 자비로우신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부처님의 공덕에 힘입어 극락왕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성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한 구조이다.

물론 신학적이고 불교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이가 정말 그 이름을 ‘믿느냐’ 하는 것이다. 그저 이름을 부르기만 한다고 그 이름의 힘과 권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며 드리는 습관적인 기도가 정말로 예수의 이름에 참여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이름과 동시에 믿음을 강조한다. 아니 믿음이 전제된 ‘이름 부르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고 나서 예수와 결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속에서 예수와 결합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예수의 이름을 말하게 되는 게 순서인 것이다. 정말 예수와 하나 되어 기도한 후에 그것이 예수와 능력에 힘입어 드린 기도라고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빈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도의 순서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늘 반성할 일이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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