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23세, 활동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으로 조니워커 별명얻어

 

▲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제2차 바티칸공의회등을 통해 가톨릭교회 변화추진

전임 교황 비오 12세의 후임으로 베네치아의 대주교 안젤로가 261대 교황으로 당선직후 강복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나타나자 환영하는 인파속에서 일부는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다. 작은 키에 배가 나온 ‘땅딸보 영감’이 교황이 된 것이다.

전임 비오 12세가 세련된 법률가 타입이었기 때문에 시골농부 같은 요한 23세의 외모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언론도 그의 나이가 77세인 점을 감안해 과도기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요한 23세의 출발은 신통치 못했다.

그러나 비호감의 이 땅딸보 교황은 약 6년간의 짧은 임기동안에 그 어떤 장수교황도 하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선입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그가 재임했던 시기는 미·소간의 대립심화로 인한 핵전쟁위기, 아시아-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의 출현, 베트남 전쟁과 쿠바혁명 발발, 학생혁명과 남녀평등 요구 등이 확산되는 격변의 시대였다.

요한 23세는 시대의 필요와 요구를 교회 안에 관철시키기 위해 이른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처음에는 이에 반발하는 추기경이나 주교들도 있었지만 그는 “(공의회는)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 역사적 소송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모여 분열을 끝내기 위한 것”이라며 공의회를 관철시켰다.

 

1962년 10월 11일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회개와 쇄신을 강조했고 이 자리에는 전 세계 가톨릭 주교들이 참석했고 종교개혁이후 갈라진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등 개신교의 주요 교단과 공동체들, 일반 가톨릭 신도들도 초청받았다.

공의회는 보수파 주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쇄신'이라는 주제에 따라 당시까지의 수구적이며 폐쇄적인 교회의 모습을 바꾸어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톨릭과 제1세계 중심의 논리에서 벗어나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고 한 것이다.

이후 가톨릭교회는 교회일치와 현대화·민주화·지역화를 통해 사회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1054년 이래 분열된 동방정교회와 화해하고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갈라졌던 개신교를 ‘분리된 형제’로 인정했다. 또한 라틴어로 봉헌되던 가톨릭의 미사와 성경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허용했고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칼 라너의 신학을 받아들여 타 종교와의 대화를 추진했다.

공의회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천주교회도 예배의식의 토착화와 간소화에 박차를 가했다. 미사를 비롯한 모든 의식에서 우리말의 사용을 확대했고 개신교단과의 협력을 통해 신구교 연합 <공동번역 성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또 사목위원회를 조직하여 평신도가 교회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제사를 인정함으로서 유교적 전통에 민감한 한국인의 정서에 쉽게 접근했다.

이와 더불어 대사회적 발언도 강화되었다. 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지배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이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러한 내적 혁신과 사회활동은 80년대 이래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열린 자세와 포용성으로 교회일치와 세계평화에도 기여

가톨릭교회의 일대 변혁을 일으킨 요한 23세는 개인적 삶에서도 소박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신자들은 물론 일반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즐겼다.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거룩한 공간에서 벗어나 공장과 양로원과 감옥 등을 찾아다니며 평소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요한23세의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지켜본 위스키 애호가들은 그의 교황이름을 따 조니 워커(Johnnie Walker 부지런한 요한)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요한 23세의 이러한 서민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은 일반 정치인이나 고위직 종교인들이 벌이는 대외 홍보용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하느님보다는 낮으나 인간보다는 높다"고 말한 인노센트 3세나 1870년 “교황은 결코 오류나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한 피우스 9세처럼 거만하거나 황당하지 않았다.

요한 23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주재 외교사절로 활동하면서 수천 명의 헝가리계 유대인을 나치의 대학살로부터 구해내기도 했다. 폴란드소재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들은 그는 교황 비오 12세에게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더 이상 폴란드로 보내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도록 해 헝가리계 유대인들의 수용소행을 중단시켰다.

또 터키로 피난 온 약 1만 2천명의 헝가리계 유대인의 해외 도피를 위해 문서를 꾸며주었고 1944년 말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엄밀한 조사를 통하여 나치에 협조한 가톨릭 주교들을 모두 파직시키면서도 프랑스에 감금되어 있던 독일군 포로들에 대한 인도적 대우와 조속한 귀국을 촉구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소련이 핵탄도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극한대결을 벌이고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자 케네디 미 대통령과 소련의 후르시쵸프 서기장간의 대화를 주선해 사태해결에 큰 기여를 했다.

교황으로 당선된 직후 인사말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들은 언제나 단명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요한 23세는 짧은 임기를 오히려 신이 선사한 소명으로 알고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열린 자세와 포용성은 신자유주의와 종교 근본주의가 득세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갈라진 오늘날의 세계에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술꾼들에게 애칭을 얻을 정도로 보통사람들과 가까웠던 요한 23세. 그가 그리워지는 것은 사회양극화로 새로운 계급사회가 도래하고 교회 역시 과거 권위주의로 돌아가려는 시기에 성직계급의 권위를 벗어던지고 교황도 인간이며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의 유일한 인물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백찬홍 (유영모,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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