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이미지와 환상ㅣ다니엘 부어스틴ㅣ사계절 2004

현실을 호도하는 이미지

미국의 제9대 해리슨 대통령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태생적 신분을 유권자들에게 그대로 알릴 수 없었습니다. 귀족의 이미지는 서민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죠. 그의 선거참모들은 그를 통나무집에 살며 사과술을 마시는 보통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그는 결국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그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1841년 3월 4일은 비까지 내리는 추운 날씨였죠. 그러나 그는 외투도 입지 않고 한 시간 반이 넘게 취임 연설문을 읽었습니다. 결국 그는 급성폐렴에 걸렸고, 병을 얻은 지 꼭 한 달 만인 4월 4일 세상을 떠났죠. 취임식에서 궂은 날씨에도 외투를 입지 않은 것은 전쟁영웅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고, 68세에도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젊음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기 때문이었죠.

미디어를 통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겠다는 선거 전략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격이 깐깐하고 대쪽 같은데다 다소 귀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고 알려진 어떤 후보는 대선기간에 갈색 계통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어린아이를 안아주는 포스터를 제작했죠. 선거참모들은 실제로 그 후보의 성격이 자상하고 부드러운지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포장만 잘 하면 그만이죠. 미디어를 통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포장하라. 바로 이것이 미디어 정치의 전략인 셈이죠.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보여주겠다는 정치인 있다면 아마도 선거참모들과 한바탕 설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일까요? 요즘 세상이 진실보다는 거짓 이미지가 더 잘 통하는 세상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의 상황을 가정해보세요. 친구가 내게 좋은 신발이라며 선물을 해주었습니다. 친구의 선물이라서 남을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명상표도 아니어서 신기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해준 친구의 정성을 생각하면 신지 않을 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신발을 신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그 신발을 신고 다니다 보니 그 신발이 TV에 자주 등장한다고 해봅시다. 유명가수도 그 신발을 신었고, 유명 배우도 신었습니다. 게다가 라디오와 CF에 그 신발의 광고도 자주 등장합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때 심경이 어떻겠습니다. 갑자기 신발에 애착이 갈 것이고, 좋은(?) 신발을 선물해준 친구가 갑자기 고맙게도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신발의 품질에 있을까요, 아니면 그 신발의 유명세에 있을까요? 답은 아마도 후자일 것입니다.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아도 좋습니다. 여기 품질이 빼어나고 가격도 싸지만, 그러나 이름이 없는 제품이 있다고 해보죠. 또 한편에는 앞의 제품보다 품질은 좀 떨어지지만 가격은 좀 비싼, ‘짝퉁’의 물건이 있다고 해보구요. 물론 진품과 거의 완벽하게 흡사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짝퉁임을 판별할 수는 없습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제품을 고르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품과 구별이 안 되는 짝퉁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그 제품이 진짜인가 아닌가에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그 제품의 브랜드 가치죠. 그렇다면 브랜드 가치는 어떻게 결정될까요? 광고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브랜드 가치는 미디어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다시 말하면 얼마나 광고비를 쏟아 붓느냐에 따라 브랜드 가치가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명성과 위대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대인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그의 책 <이미지와 환상>에서 “명성(fame)과 위대함(greatness)의 잣대가 현대사회에서 달라졌다.”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현대에는 명성과 위대함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과거의 명사(名士)들은 스스로 만든 ‘업적’이라는 실체가 있었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 사회의 명사들은 영상매체라는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신발도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명품들은 그 제품의 고유한 질과 그것을 만든 장인들의 업적이 만든 결과였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명품은 그 제품에 들인 광고액수가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름은 거저 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름이 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명성의 실체가 광고액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참으로 허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 부어스틴의 지적처럼 현대인들은 점점 명성과 위대함을 구분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인지도, 즉 명성을 곧 그 사람의 사람됨의 크기로 착각하는 거죠. TV에 나오는 스타들의 행동을 눈여겨보세요. 무조건 뜨고 보자는 심정으로 온갖 소음을 만들어내는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이 있는지요. 야하면 어때, 조금 폭력적이면 어때, 나를 대중들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어떤 소음이라도 만들겠다는 태도를 경영학적 용어로는 ‘노이즈 마케팅’이라 합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막장 드라마’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 할 수 있지요. 드라마의 질로서 승부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일단 소음(Noise)이라도 내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어보자는 교묘한 시청률 지상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사람들은 가짜에 끌릴까

왜 사람들은 진짜보다 가짜, 즉 이미지를 중시하게 되었을까요. 다니엘 부어스틴은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사회의 배후에 이른바 '그래픽 혁명'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l830년대 전신기가 발명되고 통신사가 등장하고 인쇄와 현상 기술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사람, 풍경, 사건을 인쇄된 이미지로 만들고 보관하고 전달하고 배포하는 기술이 급격히 진보합니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달한 이미지 덕분에 "미국인은 환상이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 이미지가 실체보다 더 위엄을 갖는 세상에 살고 있다...(중략)...우리는 가짜 사건의 애매모호함을 즐겁고 환상적인 경험으로 여기고 있으며 인위적인 현실을 사실로 믿음으로써 위안 받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입니다. 그는 "진짜 서부 카우보이보다 가짜 존 웨인을 더 멋있는 카우보이로 여기게 됐다"고 개탄합니다. 과연 저자의 푸념이 과장된 제스처에 불과할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할리우드의 영화들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최첨단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지원을 받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만들어 내는 영상들은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사실 이미지란 실재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실재가 먼저고 이미지는 나중이죠. 본말을 따지자면 실재가 본(本)이고 이미지는 말(末)입니다. 그런데 할리우드 애니매이션을 보다보면 이미지는 현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름대로의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미지가 갖는 실재보다 더 실재와 같은 성질을 ‘하이퍼 리얼리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과 다른 곳을 꿈꿉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은 기와집을 꿈꾸고,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은 더 좋은 집을 꿈꿉니다. 삭막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멋진 여행을 꿈꿉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했지만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고 족함을 아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더 나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사실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지 않고 환상만을 좇는 행동은 문제일 것입니다. 가령 인터넷을 통해서 ‘사이버 애니멀’을 키우면서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밥을 굶기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동호회 회원들과 밤새 채팅을 하면서도 집안 식구들과는 도무지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사이버공간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집에서 살림만을 하던 여성이 인터넷 까페에서 ‘글쓰기 짱’으로 이름을 날린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체성이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준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과 실재와의 현격한 괴리는 결국 자아의 분열을 초래할 뿐입니다. 정체성이란 인격의 동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지만 우리는 그 모든 ‘나’를 하나로 인식합니다. 바로 그 하나라는 동일성이 우리의 자아인 셈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보여지는 ‘나’와 실재의 ‘나’ 사이의 현격한 괴리는 곧 자아의 분열을 의미하는 셈이죠.

다니엘 부어스틴은 인간이 환상을 좇는 까닭은 ‘과도한 기대 심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과도한 기대심리란 현실을 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겠죠.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은 결코 헛된 망상에 빠지지 않으니까요. 고려시대의 만적은 자신이 노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했습니다. 자신이 노비라는 현실을 망각하지 않았죠. 그는 현실을 똑바로 보았습니다. 바로 이런 현실주의가 만들어낸 것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만적의 혁명적인 세계관입니다. 세상에 귀천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에 만적은 귀천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만적의 난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술이 만들어낸 세계는 가짜에 불과할까?

예술은 꾸며진 것, 엄격히 말해서 가짜입니다. 비슷하지만 실은 가짜, 즉 ‘사이비(似而非)’란 말입니다. 그러나 예술은 단순한 가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꾸며진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실재의 세계를 반영하고 인간의 삶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줍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과연 살만한 세계인가. 우리가 사는 곳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반성하게 해주는 것이 예술입니다. 아마도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서 그 작품을 낳은 시대가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치열하게 반성하고, 그가 진정으로 소망하는 세계를 그려냈을 것입니다. 그가 그려낸 이상적인 사회 ‘율도국’은 물론 허균이 가상으로 꾸며낸 허구의 세계, 가짜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가짜의 세계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허균이 살고 있는 시대가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는 것이겠죠.

진정한 작가가 만들어내는 환상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환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연예인들의 마케팅과도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현실의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약물중독자의 환각과도 다른 것입니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환상은 결코 현실에서의 도피가 아닙니다. 현실이 결핍한 것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보고, 응당 있어야 할 세계를 작품 안으로 불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타인의 평가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위가 지나치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입니다. 대체로 자기를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이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소중한 존재의 평가가 타인의 평가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믿을 수 없고, 나라는 존재가 형편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내 스스로가 나에 대해 내리는 평가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쌓는 길은 무엇일까요? 공부의 내공을 쌓고, 판단과 실천의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요? 냉정한 판단력으로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공부는 힘을 기르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현재 배문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출판인회의 '이 달의 책' 선정위원, 청소년출판협의회 고문 등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도서정보 포털사이트인 '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에서 연재한 북리뷰를 모아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소나무)를 냈으며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과학편』(휴머니스트)를 저술했다. 한국출판인회의 '이 달의 책' 선정위원, 청소년출판협의외 고문 등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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