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 타종교보다 총독부 관계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
- 매월 첫째 주일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애국주일로 지내..

 

▲사진/한상봉
숱한 논란 속에서 <친일인명사전>이 3권으로 출간되었다. 지난 11월 8일 효창공원 안의 백범 묘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에서 김병상 신부(이사장)는 “한민족을 유린한 일제의 침략자들과 손을 잡은 자들로 인해 민족의 피가 더럽혀졌다. 이제 친일사전 발간으로 상처와 아픔을 걷어내고 이 땅을 순수한 혈통으로 가꿔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정신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애쓴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인사했다.

이번에 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은 “반민특위 해체 후 60여 년 만에 이룩한 쾌거이다. 사전에 수록된 4,389명은 역사적, 실증적 검증을 거쳐 친일행적이 명백한 사람들이다.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외세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성숙한 내부고백이 필요하다. 일제치하에서 출세,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심판은 준엄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지방편·해외편), 식민지통치기구사전, 자료집, 도록 등 총 20 여권의 친일문제연구 총서를 2015년까지 완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친일인명사전>에는 천주교 인사 가운데 미리 발표되었던 7명의 인사(노기남 대주교, 김명제 신부, 김윤근 신부, 신인식 신부, 오기선 신부, 장면, 남상철)가 모두 등재되어서 앞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등의 반응이 주목된다.

그동안 서울대교구는 지난해 7월 28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가톨릭계 인사들을 사전에 포함시키는 것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당시 서울대교구 측은 “노기남 대주교 등 가톨릭 인사 7명이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명단에 포함된 것은 대부분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연맹,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등 단체에 간부로 속해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 마지막 시기에 종교 등 각 단체 책임을 진 인물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만든 총동원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들이 형식적으로는 이 단체에 속해 있지만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한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로 보기는 어렵다”며 정상 참작을 요청했다.

또한 노기남 대주교의 경우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 7월 3일 서울대교구에 "노기남 대주교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보내오자 서울대교구 측에서 이의 제기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여기서는 "당시 노 주교의 행동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다른 친일 행위자들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결성 관련 <매일신보> 1939년 5월 16일 기사(사진/한상봉)
사전에 수록된 4,389명 가운데 개신교 인물은 56명(목회자 42명, 평신도 14명)으로 나타났는데, 천주교 인물이 7명에 불과한 것은 천주교회의 친일행적이 개별적인 행위보다는 교단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국민정신총동원과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등의 이사장 및 이사급 등 책임자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평신도인 장면과 남상철 등은 천주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 친일행적이 있는 인물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해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천주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총독부와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고 한다. "신사참배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없진 않았으나, 이 문제도 1932년 교리문답의 수정과 1936년 교황청 포교성의 지시에 순응함으로써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사전 해제에는 천주교 관련 친일행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의 독려에 따라 8월 15일 종현천주교청년회에서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를 열고 고문신부로서 노기남 신부가 참여하여 시국강연을 했다. 이후부터 각종 시국행사에 동원되다가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하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맹했다.

1937년 7월부터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친일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와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됨에 따라 그 다음 달인 11월 10일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일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연맹 상회(常會)을 거행하며,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단체로 하도록 지시했다. 지방연맹과 각 본당의 애국반도 개편과 설립을 독려하여 1941년 봄까지는 지방에도 교구별로 교구연맹이 조직되었고, 본당에는 지방교회연맹과 애국반 조직이 완료되었다.

각 지방교회연맹의 이사장은 각 본당 신부들이 맡았다. 1941년 5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총회를 열어 이른바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 무렵 경성교구연맹 이사회에서 '군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매일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1942년 3월 <경향잡지>를 통해 '대동아전쟁 기구(祈求)'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조과(朝課)나 만과(晩課) 끝에 기도하도록 통지했다. 1942년 9월 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이 노기남 주교에서 남상철로 바뀌고, 1943년 10월 이사장이 직접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주최 징병제 관련 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장연ㆍ신천ㆍ제천 등지에서 강연했다.

노기남 주교는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1943년 11월 6일 임시특별지원병(학병) 시행을 계기로 적극적인 내선일체, 대정익찬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기독교ㆍ천주교ㆍ불교ㆍ천도교 등 종교단체가 연합하여 조직한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주교 측 위원으로 참여했다. 노 주교는 1944년 12월 8일 정무총감을 총재로 하고,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창설할 때 천주교를 대표해서 이사로 참여했다.

남상철 이사장도 1944년 2월 8일부터 3월 7일까지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보도특별정신대(報道特別挺정身隊)에 참여하여 전라북도 옥구ㆍ김제ㆍ부안 등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1945년 1월에도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주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경기도 시흥ㆍ수원ㆍ평택ㆍ안성 등지에서 강연했다. "(친일인명사전 1권,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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