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사진/한상봉

나는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한 남자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이며, 또한 동시에 한 명의 당당한 여성이기도 하다. 나의 가족은 서로에게 크게 짐을 지우거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아이들도 대부분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다. 교회는 우리에게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 표현이 가족구성원이 무조건적 희생으로 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 작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가르치는 ‘큰 교회’에서 활동하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물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나(여성)는 누구인가', '여성(나)은 교회 안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교회는 여성(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와 같은 고민들이다. 교회 안에서 여러 전례에 참여하고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내면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질문들인 것이다.

작년 11월 말, 본당 헌화회원들이 대림환과 성탄장식을 만들면서 있었던 일이다. 헌화회원들은 대림절 동안 집에서 밝힐 대림초와 본당 제대에 놓을 대림환을 만들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대림절과 성탄절 전례에 맞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수시로 만나 의논하였고, 비용과 품질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여러 차례 시장조사를 하였고, 마지막 날에는 집안일도 뒷전으로 미루고 팔을 걷어붙이고 늦게까지 작업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에는 아랑곳없이 본당사제는 그들의 작업을 보고 그들에게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마구 쏟아 부었다. ‘유치하다’, ‘세련되게 할 수 없느냐’, ‘1차원이다’, ‘안목을 높여라’, ‘그만 두어라’ 등 원색적인 말들이 거침없이 그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고, 헌화회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들은 열심히 봉사하였다. 시간을 쪼개서 서로 만나 의논하고, 자기 돈으로 기름 값을 내가며 여기저기 시장을 보았고, 집안 식구들을 몰라라 하며 성당 일을 하였는데, 돌아온 것은 회사 사장이 직원에게나 하는 질책과 호통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준이 본당 사제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고,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이 성당을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스럽다는 불편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얼마 후, 본당사제는 헌화회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꽃을 꽂아야 할 사람이 분명 필요했을까, 필요한 몇 사람은 구역장 등 다른 직책으로 자기 곁에 두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어느 한 본당, 혹은 어느 본당 사제의 미성숙한 성품으로 인한 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제도교회가 여성신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임은 틀림없다. 여성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온갖 일을 한다. 구역․반 활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전례봉사, 제의방, 성물방, 그리고 레지오와 빈첸시오 등 어느 활동에서나 여성신자들은 주요하고 막중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성을 늘 말없이 일하는 존재로만 남게 하려 한다. 온갖 수난에도 그저 묵묵히 참아내는 여성을, 어머니를 가부장적인 사회는 아름다운 형용사로 미화시켜가며 끝없이 여성을 수탈해왔는데, 교회는 거기에다 순명과 기도, 희생을 더해 더욱 더 여성을 누르고 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지적해 온, 양성평등에 기초한 여성신자의 의사결정권이나 참여 등은 여전히 먼 이야기고, 위 사례와 같은 인신공격적인 행태는 조금씩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는 대다수의 여성신자들을 본당을 꾸려 나가는데 필요한 노동자이며 생산자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신자들의 교회활동은 봉사라는 미명하에 노동과 생산에 따른 급여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신자들의 영성과 충성도를 잘 이용하면 된다. 스스로 ‘오너’라고 말하는 사제는 가끔 회식 자리를 마련해주고, 버스 빌려서 설악산 여행시켜주고, 혹은 마치 그들에게 만나기 힘든 기회를 제공하는 듯, 비싼 해외여행프로그램도 기획해 주면 된다(물론 자비 부담이지만). 생색은 본당사제가 하고 비용은 물론 신자들이 낸다. 그리고 신자들은 ‘우리본당신부님 멋져’로 화답한다. 이렇게 그 시너지효과는 투자를 상회한다. 그래서 이런 사제들을 보고 최고경영자(CEO)라고 하는 것이고 그들도 이런 표현을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는지 모른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현상은 복음화와 활성화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본당에 만연해 있다.

오래 전, 어느 주교님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성모님을 본받아 ‘가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야 한다.”(가톨릭신문, 1997년 5월 25일자)고 말했단다. 주교님이 어머니를 쓰레기통에 비유하고 있으니, 혹시 사제는 교회 안의 여성신자를 자신의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너무 자조적이고 자기비하로 흘렀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도 이렇게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이다. 여성신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인격적 교회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