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 따라 배우기-12]하느님 현존에 대한 전적인 신뢰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에게 삶이란 하느님의 영과 함께 걷는 흥미로우면서 진지한 사랑의 여정이었다. 그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의 그룹 안에 끼어 넣으려고 애쓰지 않았고 사업의 효율성을 위하여 기관을 설립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톨릭일꾼 신문을 만들 때에도 환대의 집을 운영할 때에도 우려와 관심을 가졌으나 불확실한 현실 때문에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가톨릭일꾼 신문을 처음 만들 때 도로시 데이는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하였다. 그 당시 도로시 데이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도로시 데이의 평생에 걸친 지침이 되었다. 실제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규정이나 재단, 이사회도 구성하길 원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안전장치에도 기댈 생각이 없었다. 불안전함과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느 환대의 집 일꾼들이 현실적으로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을 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마이클, 당신의 신앙은 어디 있어요?”

정부가 준 것을 정부가 가져갈 수 있다

돈과 재산에 관한 도로시 데이의 생각은 신앙으로 꽉 차있었고, 또 한편으론 실용적인 것이었다. 돈이 필요할 때 도로시와 일꾼들은 하느님께 청했는데, 때때로 단식을 하거나 가까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계속 바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간혹 필요한 액수에 꼭 맞는 기부금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로시는 중앙집권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절대 반대하였다. 물론 도로시와 일꾼들은 도움이 필요하거나 국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하여 혜택을 받도록 도왔으며, 행정적 문제로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서류를 마련해 주고 복지기관에 찾아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에서는 전혀 정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도로시 데이는 “정부가 준 것을 정부가 가져갈 수 있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사회는 가족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부에 기대지 않고 개인의 순수한 애덕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나눔을 통해 무료급식을 계속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한편 도로시 데이는 참으로 내재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육화의 측면을 확신하는 영성을 가졌다. 그는 창조 속에서, 특히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들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다. 도로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정말로 알아보는 길은 우리가 아는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로시는 모든 것 안에서 선함과 하느님다움을 보았다. 급식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수척한 얼굴들 속에서, 고급스러운 리넨 손수건과 도시의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온 가죽나무의 울퉁불퉁한 아름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을 즐겨 인용하였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

도로시 데이의 육화 영성이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뜻하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육화되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육화를 지속한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도로시 데이와 친밀감을 나누던 롤하우저는 “하느님께서 한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동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고 그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행동 하신다”고 표현하였다. 도로시 데이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리지외의 데레사와 더불어 흠모하였는데, 대 데레서 성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당신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도로시 데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의 영성생활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가장 심오한 첫 번째 회심은 감옥 체험에서 일어났는데, 거기서 그가 읽고자 했던 것은 단지 성경뿐이었다. 그리고 개종 이후에는 전형적인 가톨릭 영성생활에 충실하였다. 도로시는 가능한 대로 매일 미사를 하였으며, 원하는 이들과 저녁기도를 바치고, 묵주신공과 중재기도, 예수호칭기도, 침묵기도를 드렸다. 그는 자신이 일에 압도되어 있는 것에 저항했으며 혼자서 독서하고 기도하며 침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도로시의 미사 책에는 그가 기도해 주고 있는 긴 목록의 사람들 이름이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산상설교에 따른 영원한 개혁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께는 시간이 없고 영원만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일과 사람에 대해서도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중재기도 중에 특별히 자살한 사람들을 기억하였다. 그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을 엮어서 기도하였는데, “만일 누군가 이러한 ‘기도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톨릭일꾼운동의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라고 상기시키곤 하였다. 후에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삶에서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덕분이다.”

도로시 데이는 1927년부터 1980년까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걷는 영적 여정에서 하느님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폐수종에 시달렸으며, 호흡곤란과 동맥경화, 심장성 부종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나 인도를 여행하여 마더 데레사를 만나고 사랑의 선교 수녀회 수련자들에게 ‘복음을 위해 옥에 갇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으며, 1973년에는 76세의 나이로 전미국트럭운전사조합(IBT)에 반대하여 비폭력 시위를 벌인 산 조아퀸 밸리의 차베스와 농장 노동자연맹에 합류하였다. 이 때문에 다른 항의자들과 더불어 구속되어 열흘간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그녀는 1980년 11월 29일 초저녁에 사랑하는 딸 타말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뉴욕시의 그리스도 탄생 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생전에 도로시 데이는 자신을 ‘성인’으로 일컫는 이들의 생각을 딱 잘라 거절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산상설교에 근거한 ‘영원한 개혁’이 도로시의 지도력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위해서 그는 기도하고 연설했으며, 글을 쓰고 단식하고 항의하였으며, 굴욕을 참아 내었고 감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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