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그리스도교 한국적이기 위하여>, 이대 출판부

요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꽤나 이념적이며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몇 년 전부터 거리와 매체를 뜨겁게 달구었던 바로 그것은, 사회주의와 좌파에 대립하는 자본주의와 우파의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정체성’ 이라는 기표는 이미 가치론적 어의를 지니고 있는 불편한 언어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이라는 표현은 왠지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만일 이 단어를 ‘한국적’이라고 바꿔 본다면, 이 기표에는 이념적인 것 보다도, ‘문화적’ ‘종교적’ 냄새가 난다.

마찬가지다. ‘기독교’라고 하면 왠지 개신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하기사, 교회의 간판마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기독교 장로회” “기독교 감리회” 등등의 교단의 ‘정체성’을 표시해 왔으니, 기독교=개신교라는 등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겠다.

요즘에는 개신교를 비하하는 인터넷 용어 ‘개독교’까지 나왔으니, 기독교라는 기표에 담겨진 내면적 어의는 분명히 부정적 이미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라는 용어가 재발견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기독교와 정체성을 빗겨나가, 다시금 그 논쟁을 재구성한 이찬수 박사의 새책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그리스도교 한국적이기 위하여>가 반갑게 보인다.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교에 관해서, 또한 자신을 정체화한 그리스도교인에 관해서 그리고 이들이 ‘한국’이라는 민족적 기표와 만났을때, 어떤 상황이 이루어졌고, 또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다룬 책이다. “어떤 상황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야말로 해석과 비평의 대상이며, “이루어져야 하는가”는 비평가의 소망이다. 비판이 아닌 ‘비평’이다.

목사 신분인 저자와 같이, 비록 한국교회의 극단적 보수세력이 저자를 압박한 역사도 있지만,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해서는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글은 한국적 정체성을 위한 기독교비평이 아니고,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또한 소 제목은 ‘그리스도교, 한국적이기 위하여’이다. 책의 제목은 편견섞인 언표를 비껴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시 그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애정인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부는 “한국 그리스도교 그 연구의 역사”로써,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학자들이 그리스도교와 한국이라는 ‘결합’을 어떻게 풀어나갔는가를 조명하면서, 이에따라 생겨난 문제제기를 통해 저자의 최근 연구성과로 응답하고 있다.

과거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 종교의 호교론 혹은 선교론에 치우친 나머지 ‘한국’이라는 주요 요소를 무시하거나 제외시키고 때로는 훈육의 대상으로만 인식했다고 하며, 천주교는 천주교대로,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자(自)종교의 상대적 우월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적’이라는 틀은 상실되거나 왜곡되고, 서양사상에 대한 우월의식과 교파간 경쟁주의만이 중심 담론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근대화를 맞이한 한국이라는 독특성 때문에, 서구제국주의를 배경한 그리스도교에 한국민들이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인 것 같이...

한국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구조’적 성장 배경을 비평하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와 “한국적”이라는 두 기표와 어의를 추적해 들어간다. 식민지 시대에 서양적 냄새를 풍기며 신지식층들을 독점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한국이라는 주변, 서양이라는 중심” (154쪽) 혹은 “황색 피부에 백색 가면을 쓴” (156쪽) 오리엔탈리즘을 확산시킨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찬수 선생
그는 또한, ‘한국적’이라는 틀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하는 옥시덴탈리즘 내지는 민족주의적 수구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 특히 그의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언어는 “대립구조의 전복”이다. 저자의 말을 직접 빌리자면: "한국이라는 주체와 그리스도교라는 객체, 그리고 그 역의 관계가 적절히 이루어짐으로써 한국과 그리스도교 모두가 제대로 살아나게 된다는” (167쪽)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 한국인과 전통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써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으로써 한국인이라는 ‘대립구조’가 결합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 둘의 적절한 갈등과 전복이 이루어짐으로써, 전혀 새로운 사상과 신학 그리고 문화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일본의 중국문학자인 타케치 요시미의 말을 빌려 “문화적인 되감기”라는 언어로 재구성 하고 있다. “한국적 그리스도교”라는 틀에서 문화적 되감기를 해독한다면 이는: “한국적 기초 위에 서양을 받아들여 한국적 기초가 특수하면서도 그만큼 보편적인 것임을 밝혀주는 작업이며... 구미 문명을 포함해 모든 것이 특수하다는 논리에 이바지” (171쪽)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그리스도교가 특수하듯이, 구미적 혹은 유럽적 그리스도교도 특수한 것 뿐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다중심, 혹은 다양한 한국적 그리스도교일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의 다양성과 깊이를 인정할 때, 한국적 그리스도교는 훨씬 더 풍성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대립적 전복이 가능성, 수행적 그리스도인

제 2부에서 그는 과거의 그리스도교를 비평하던 것을 넘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비평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장을 둘로 나누어 “한국의 그리스도교 과연 민족적인가?”와 “한국 그리스도교 인권을 신장하는가?”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자가 전제하는 ‘민족주의’는 타자를 대상화시키는 협의의 민족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라는 표현보다도 동질언어와 종교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한국인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저자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왕정이 끝나고 자발적으로 민족국가가 성립하던 기회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식민지 제국에 저항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의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이 개념의 발달이 오늘날 민족주의적 집단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타자성을 생산하고 있기는 하다), “민족에 의해 일깨워진 신앙의 한국적 정체성은 민족이 신앙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해 신앙 속으로 녹아들어갈 때 확립된다.” (199쪽) 문화적 휘감기가 “한국적 그리스도교”로써 ‘한국적’에 관심을 집중 하여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민족’이 신앙 안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대립구조가 전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립구조의 전복과 문화적 휘감기라는 근본적인 틀로 저자는 자신의 전문영역인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다루어 내고 있다. 특히 7장과 8장에서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교 불교의 조화 가능성에 관해서 탐구하고 있다.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와의 대립구조의 전복이 가능하다면,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대립적 전복이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우선 저자는 선교사들과 한국 개신교층의 절대 다수인 보수종파의 시각을 비평한다. 즉 선교사들의 서양 우월주의가 초창기 개신교에 미친 불교에 대한 편향적 이해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분석하고, 이 초창기 종교 지도자의 시각들이 어떻게 오늘날의 훼불사건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 다석 유영모 만년의 유영모 선생이 구기동 자택을 거닐며 사색하고 있다 (사진출처/씨알재단)
그렇지만, 대립구조 혹은 대립문화와 종교가 전복되듯이 불교학과 신학을 조화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의 다양한 신학자들이 대립구조와 문화의 전복, 혹은 문화적 휘감기의 시원을 유영모, 함석헌, 김흥호, 강원용과 같은 수행적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이들을 뒤이은 다양한 신학자들을 예로 들면서, 비록 대중적 개신교의 태도가 편협하고 극단적일 지라도, 개신교 일각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저자의 은사이기도 한 길희성 교수의 그리스도론과 불교와의 조화를 탐구한 글은 그가 생각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의 궁극성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선사 지눌과 일본의 선사 신란을 에크하르트적 절대 무의 체험으로 읽고, 기독교 신의 존재를 ‘인격’적 존재라는 표현보다도 ‘에너지’ 곧 ‘힘’으로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살 예수”로 재구성하고,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의 융합, 곧 자타自他를 넘어선 절대絶對의 체험을 내어놓는 것은,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론이 서로 휘감아 돌아 대립구조의 전복으로 태동한 한국적 그리스도교 신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이야 말로 비정통적..

바로 이러한 한국 그리스도교야말로, 정통의 길이 아닌 ‘비정통의 길’로 가야만 하는 한국그리스도교의 일면일 것이다. 환언하면,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이야 말로 비정통적이며, 특수한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식민지를 거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비정통적 그리스도교의 실례實例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다가 감리교에서 쫒겨난 신학자 변선환을 들고 있다. 변선환에 의하면, 한국적이라는 특수성은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포함해야 함은 물론 한국이라는 정치적 윤리적 ‘상황’에 뿌리를 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종교해방신학”이라고 했다. 따라서, 저자는 변선환의 글을 통해 신학이란 휴머니티의 전체성의 회복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와 불교 또한 한국의 문화에 대해 고민하던 것을 궁극점까지 치고 나간 것이다. 아마도, 더 많은 사유와 글과의 만남이 진행된다면, 그의 글쓰기는 더더욱 정교해 질 것이다. 앞으로 불교와 함께 유교, 민족종교 그리고 대중문화와 신종교가 문화적 휘감기와 대립구조의 전복을 통해 한국내 휴머니티의 전체성 회복이라는 운동으로 커져가는 미래를 조심스럽게 희망해 본다.

최대광  
감리교 신학대학교 (B.A), 미국 Pacific School of Religion (M.Div/M.A) , 영국 Lancaster University 종교학과 (Ph.D) , 현 감신대 강사, 정동제일교회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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