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31 ]

▲천지 창조(부분) 노아의 홍수,시스틴 성당 천정화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전처럼 모든 짐승을 없애버리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창세 8,21-22)

하느님은 구원하는 분이지 저주하는 분이 아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무법천지’가 되다시피 한 세상을 큰 홍수로 ‘청소’하시고는 노아의 식구들을 중심으로 새 세상을 여셨다. 이른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 위 인용문은 물이 빠진 뒤 노아의 식구들이 배에서 내려 번제를 드리자 하느님께서 그 번제물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시고는 속으로 다짐하신 내용이다. 악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시는 사람을 저주하거나 짐승을 없애버리는 일은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계절이 변화하듯이 그렇게 변화하는 세상은 끝이 없으리라며 피조물의 희망찬 미래를 홀로 그리신다. 그리고 급기야 노아와 그 아들들을 향해 거듭 다짐에 약속을 더하신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이제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과 계약을 세운다. 배 밖으로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그 밖에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도 나는 계약을 세운다.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 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표는 이것이다.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나는 너뿐 아니라 숨 쉬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이것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짐승과 나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이다." 하고 다시 다짐하셨다.(창세 9,8-17)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학적 비판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여기(창세기,6-9장)에 나타난 고대 이스라엘의 자기 이해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다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다짐과 약속의 대상에 이스라엘 외의 모든 종교들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둘째, 하느님이 사실상 전 인류와 새롭게 맺은 계약에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살아있는 증인이자 중개자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하인쯔 R. 슐렛테, 『신학적 주제로서의 종교』, 분도출판사)

이런 정신이 나중에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1디모 2,4)는, 달리 말해 하느님은 애당초부터 전 인류를 저주하고자 하지 않으셨으며, 사람에게는 한계도 있지만 개의치 않으시고 결국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전언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비가 걷히고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나타나면 하느님이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는 증거로 이해하라는 메시지(16)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되새겨져야 하는 ‘보편적 구원의지’의 징표인 것이다.

물론 교회가 하느님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지옥불로 내모는 저주야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이다. 가령 플로렌스공의회(1439-1445)에서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의 말씀으로 설립된 로마 성 교회는 가톨릭교회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 즉 이교인뿐 아니라 유다인, 이단자들도 죽기 전에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오히려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영원한 불에 빠지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고백하고 선포한다.” '다시는 멸하지 않으리라'며 다짐에 다짐을 한 하느님의 약속을 인간이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하기야 다양한 성서 구절들을 자기 식대로 선별하고 해석하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해 온 것이 교회이기도 했으니, 애당초 교회는, 아니 인간은 구원도 하느님이 아닌 자기 수중에 있기를 늘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예수가 저주와 정죄를 부정하고 사랑과 용서를 선포한 분이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노아와 맺은 계약을 가장 충실히 구현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예수를 따른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노아 계약을 눈여겨보고 늘 강조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구원하는 분이지 저주하는 분이 아니며, 포용하는 분이지 내모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종교적 다양성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표지의 다양성

최근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공회 교회의 전례와 신자를 가톨릭 안으로 받아들이고, 성공회 고유의 전례와 전통을 허용하기로 했다”는 최근 뉴스(한겨레신문 2009년 10월 22일자 13면)를 보면서 하느님의 약속이 그래도 유효하긴 한가 보다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만든다. 교회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속사정이야 잘 알 수 없지만, 좋게 보아 저주보다는 포용에 가까운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제 아무리 예수 같은 삶을 사는 성인이자 위대한 신학자라 해도 개신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부지 어린이나 배타적 이기주의자에게도 허용되는 밀가루 전병(성체) 하나 얻어먹지 못하게 만드는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숨겨진 오만의 극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톨릭교회와 일체가 되기를 원하는 성공회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발언에도 오만함의 냄새가 여전하지만, 그래도 포용 쪽으로 선회한 것이 홍수 뒤 무지개의 흔적인 것도 같아서 다소 희망적이다.

여러 종교들은 그리스도교 이전에도 이후에도 생겨나고 성행한다. 또 그 종교들이 그리스도교식 종말의 어느 한 지점에 모두 그리스도교화하리라는 가능성도 거의 없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다시는 멸하지 않으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지켜지려면 다양해져가는 종교적 현실이 있는 그대로 긍정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종교적 다양성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표지의 다양성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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