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길-8]

▲올라! 부엔 까미노!

치유의 눈동자 
20080529 까까벨로스Cacabelos

집 떠난 지 두 달이 되었다. 오늘도 푹 잘 자고 일어나 초리소(스페인식 훈제 소세지) 잔뜩 넣은 샌드위치로 아침 먹고 길을 나섰다. 부기는 어느 정도 빠졌지만 오늘도 무리해선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여기서 11km 거리에 있는 캄포나라야 알베르게가 7, 8월에만 문을 연다고 해서 다음 마을 까까벨로스까지 18km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한참이나 가고 있는데 친절한 아주머니 한 분이 길을 잘못 들었다며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신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예수 믿으라며 팜플렛을 한 장 주셨는데 우리나라 '여호와의 증인'에서 나눠주는 것과 똑같이 생겼다. 무얼 믿든 어떤 종교를 믿든, 양심에 따라 바르고 착하게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바로 하늘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까까벨로스 정류장에 내려 알베르게로 가는 길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작고 아름다운 성당엔 고요한 분위기만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성당 귀퉁이에서 가시관에 십자가를 진 예수상을 보았을 때, 그 예수의 표정에 붙들려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고독하고 강인하면서도 자비로운 슬픈 눈을 보고 있으려니 며칠 전에 친구가 보내 준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가 생각났다. 너를 버리지 않았다고, 이렇게 나는 너를 업고 걷고 있다고- 그 눈은 내게 따뜻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한없이 자비로운 눈, 그 눈을 마주보고 있노라니 내 안의 고통이 천천히 녹아내려 눈물로 흘러나왔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 앉아 그분에게서 쏟아지는 한없는 자비를 원없이 쬐었다. 내 마음 구석구석 용서와 사랑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오래도록 저 눈을 바라보았다.

성당 근처에서 오렌지를 까먹고 있는데 미사 종이 울린다. 빼꼼히 들여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기도문을 읽고 노래를 부른다. 5월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수호성녀들이 집집마다 축복하러 다니느라 바쁘시다. 오늘 미사에 순례자라곤 나 하나여서 마을 할머니들이 모두 오셔서 뽀뽀해주시며 예쁘다고, 장하다고,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잘 가라고 복을 빌어주셨다.

까미노 여행도 이제 중반이 훌쩍 넘어섰다. 생장에서 같이 출발한 친구들은 이미 다들 집에 갔을 텐데 나는 아직 여기 있다. 그래, 난 참 운이 좋아! 집 떠나온 지 두 달. 내가 살던 곳의 모든 것들이 전생이나 어딘가 다른 행성에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리운 게 있다면 다만 사람들. 그나마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두고 왔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점점 적어진다.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까미노에서 해보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별을 보며 걷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근두근 로맨스! 사실 둘 다 지금 내겐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긴 밤 열한 시나 되어야 해가 지고,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소년'이라 오해하기 때문이다.

모래 위의 발자국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꿈이었네.
모래 위엔 두 사람 발자국이 있었네.
하나는 내 것, 또 하나는 주님 것.
거기서 내 인생 마지막 장면을 보았네.
발자국이 멈춘 그곳에서 지나온 내 삶의 길을 돌아보았네.
그런데 종종 그 길에 단 한 사람 발자국만 보였네.
그건 내 인생이 제일 비참하고 슬플 때였네.
의아해서 나는 주님께 물었네.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늘 저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제게 당신이 가장 필요했을 때 거긴 한 사람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왜 제가 제일 힘든 순간 저를 버리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네.
"귀하고 귀한 내 아이야.
나는 널 사랑하고 결코 널 버리지 않았단다.
시련과 고통을 겪는 그 순간에
네가 본 그 발자국은
바로 너를 업은 내 것이란다."
'Footprints In The Sand' by Mary Stevenson in 1938

▲이상해요. 제 가슴에서 뭔가가 녹아내려요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2008년 5월 30일 페레헤Pereje

어제 먹은 초리소 덕분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 눈물을 머금고 맛있는 초리소를 버렸다. 먹는 것에 너무도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이시라 입에서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얄짤없다.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을 먹고 여덟 시가 넘어서야 숙소를 나왔다. 오늘은 7km 남짓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목적지. 국도변을 따라가는 길도 있지만 포도밭 사잇길로 2km는 족히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편하고 쉬운 길을 알아도 매번 이런 식이다. 한 달 전 몬하르딘에선 밑동만 보이던 포도나무들이 잎을 제법 틔웠다. 초록으로 짙어가는 포도나무 잎사귀를 보니 그새 시간이 꽤 흘렀구나 싶다. 리오하주를 지나온 후 꽤 오랜만에 보는 포도밭. 포도밭 사이사이로 체리나무가 서리하기 딱 좋게 가지를 길가로 늘어뜨리고 있다. 역시나 부지런한 순례자들 손에 남아난 체리가 없다.

발목이 많이 부어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조금 염려되었는데 생각보단 상태가 좋았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튼튼하고 유연한 발목을 상상하며 걸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발목은 실제로도 한결 부드럽고 힘있어진 느낌이다. 속도도 제법 붙은 것 같다.

▲'순례자 조심'

웬 농가 앞에서 농부 아저씨가 체리랑 사과, 오렌지 따위를 팔고 계신다. 서리도 못하는 소심한 가슴이라, 사서라도 먹어야겠다. 아저씨는 작은 비닐봉지에 체리를 한 움큼 담아주셨다. 얼마냐고 물어도 답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을 펼쳐 보이니 얼른 2유로하고 1유로짜리 동전을 집어 가신다. 체리 한 주먹에 3유로라니! 믿을 수 없는 가격이다. 아무리 까미노가 상업화되었다지만 이렇게 인적 드문 시골 농가에서까지 그럴 줄이야.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으니 1유로어치만 달라고 했다. 아저씬 봉지에서 체리 너덧 개를 덜어내고 그게 1유로어치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기 집에 보까디요(샌드위치)랑 커피도 있다고 들렀다 가라 하신다. 아침 먹었단 시늉을 아무리 해도 같은 말만 반복하신다. 사람이 돈을 욕심내면, 아니 무엇이든 욕심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아저씨 모습은 참 안쓰럽고 딱해 보였다. 농부 아저씨의 체리는 기대한 것만큼 맛있지 않았다. 마침 나를 앞질러가는 순례자가 있어 남은 것을 모두 주었다. 한참을 뒤따라 가다보니 체리를 담았던 빈 봉지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걸려있다.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날이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정말 예쁜 마을이었다. 작은 강과 교회들, 맛있는 식당과 기념품 가게, 게다가 여기는 내가 고대하고 고대한 아베피닉스 알베르게의 켈트족 마녀의식이 있는 곳이다. 알베르게 앞에 일등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택시를 타고 온 사람들이 대여섯 명 내린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마음속에서 누가 더 가라고 속삭인다. '안돼, 오늘 나는 충분히 걸었고 다음 마을까진 6km도 넘는데다 여기서 한다는 켈트족 마녀의식도 보고 싶단 말이야!' 40분 동안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결국 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어찌나 결연하게 일어났던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놀란다. 오늘은 주말이고 다음 마을은 침대 수도 적었다. 이 예쁘고 볼 것 많은 마을을 떠나 침대도 없을지 모르는 곳으로 가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내 안에 있는 누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목소리는 집요했다. 게다가 항상 확신에 찬 명령조였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더 크고 더 또렷한 목소리가 더 자주 따라왔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는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국도와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선 길을 잃을 뻔했다. 그래도 빗속에서 국도변을 걷는 일은 좋았다. 국도를 따라가는 길에 노란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마치 오즈로 가는 노란 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문득 내 첫 번째 ID가 도로시였다는 기억이 났다. 행복을 찾아가는 노란 길! 들장미 향기가 코를 간질이는 시원한 빗길. 1km 더 가는 것도 벌벌 떨던 내가 6km를 예정에 없이 더 걷게 되다니. 배낭은 무겁고 발은 여전히 아프지만 나는 걷고 있다. 행복하다!

페레헤 마을에 들어서니 먼저 온 순례자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여기 알베르게는 식당 주인이 관리하느라 모든 것이 셀프다. 빨래를 해 널었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아, 단벌신사는 괴롭다.

▲가슴 속에 기쁨을 안고 나아가라!

똥강아지처럼 귀 쫑긋 세우고 있다가 일곱 시 땡! 하자마자 식당으로 내달았다. 오랜만에 식당에서 텔레비전 구경을 했다. 흡혈귀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그간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스페인 뮤직비디오가 촌스럽다며 스페인 영상 기술을 비웃곤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스타일의 차이였다. 오히려 상상력만큼은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것 같았다. 그래, 여긴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나라다. 예술에 만큼은 선진과 후진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모두 형편껏 다른 과정을 겪으면서 진화해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키가 190은 훌쩍 넘을 것 같은 독일 아저씨가 같이 밥 먹자며 내 옆에 앉았다. 훔베르 아저씨는 지금껏 봐온 사람 중에서 제일로 독일사람 같지 않았다. 시뻘건 얼굴에 하얀 수염, 엄청난 수다와 너무도 사랑스러운 표정을 가진 아저씨였다. 살가운 소녀들이 하듯이 상대방을 쓰다듬거나 툭툭 때리면서 말씀하시곤 했는데, 영화음악을 전공한 딸이 취직이 안돼 고민이라고 하셨다. 내가 뜸을 뜨니까 소프라노로 비명을 지르면서 대놓고 사진을 찍으셨다.

일기예보에서는 내일도 전국에 비 소식이다. 문득 내가 지금껏 작은 어항 안에 갇혀있던 큰 물고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겐 좀 더 너른 바다가 필요한 게다.

김순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