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에서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열려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면서도 천주신앙에 대해 포기 안 해

▲학술대회에 참석한 한 시민이 안중근 의사에 대한 묵념을 하고 있다.

▲함세웅 신부
용산참사현장에서 열흘 째 단식을 하던 문규현 신부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10월 22일,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에서는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와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이 행사에 앞서 함세웅 신부는 "안중근 의사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몇 사람 가운데 한 분이며, 그분의 자서전을 읽으며 안 의사의 외로움을 반복해서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른바 만국공법에 따라 체포한 일본군을 놓아주고 동료들에게 지탄을 받으면서 안 의사는 무척 외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때에 마음 속 참뜻을 동료들에게 확인해 줄 방법을 궁리하다가 결국 목숨을 걸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로 결정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는 함 신부는 "이러한 어둠의 체험 속에서 우리는 빛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지금도 100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라서 제2의, 제3의 안중근이 나오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과 일제, 이토를 신성화..안중근을 미신적인 악당으로 소개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프랭클린 라우시 교수(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가 발표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종교적 의미에 관한 논쟁'이 정말 논쟁이 됐다. 

라우시 교수는 일제강점하 통감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을 통해 일제가 사실상 종교와 상관없는 이토를 종교적 이미지로 채색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이토의 죽음을 아브라함 링컨의 죽음과 견주어 '순교'라고 말하는데, 이는 당시 한국에 파견된 대다수 선교사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서울신문>은 추모시를 통해 이토를 예수와 같은 인물로 묘사해 "죄를 속량하기 위해 피를 흘린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와도 같이 제단을 물들일 피를 흘린 희생제물이었다"고 하였으며, 그의 죽음이 축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그를 덕스런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그를 죽인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만들고, 안중근이 예수와 흡사한 누군가를 죽였으며, 링컨을 암살한 존 윌커스 부스와 같은 자이며,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와 같은 파렴치한 악당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안중근을 미신적이라고 낙인찍어 그의 행동이 비이성적인 동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정당화시키려던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뮈텔주교의 입장을 무시하고 안중근에게 종부성사를 주러 여순을 방문한 빌렘신부에 관한 논란도 있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과 각별한 관계여서 안중근을 찾아 갔지만, 본질적으로 빌렘 신부는 일본 식민당국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한국 가톨릭교도들이 이를 거부하지 않기를 원해서 의병들에게 당국에 자수하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서울신문>은 빌렘 신부가 한국인들에게 무력투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여 한국인들을 '빛과 정의'로 이끌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또한 빌렘 신부를 안중근이 회개하도록 이끈 모범적인 선교사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안중근은 '죄'를 인정했지만, 이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석산의 돈을 강탈한 것과 이토 이외에 다른 세 명에게도 총격을 가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일제의 의도 성공 이유는 제도권 교회의 정치적 타협 크게 작용해..

한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나서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했지만, 심문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종교를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라우시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가톨릭교회와 지나치게 가깝게 연결시키면 교회에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봐 두려워 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는 종교에 공개적으로 호소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교회와의 의절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심문관이 안중근에게 가톨릭교리에 따르면 이토 처단이 죄가 아니냐고 묻자, 안중근은 "그를 처단한 것은 도덕적 의무였다"고 답했으며, 심문관이 재차 그것은 빌렘 신부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자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라우시 교수는 만약 안중근이 빌렘 신부의 견해를 반박했다면 교회 지도자들이 그를 비난하고 성과도 없이 교회에 파문만 가져왔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프랭클린 라우시 교수

한편 라우시 교수의 발제를 듣고 토론에 나선 경희대 김권정 교수는 "이토 처단 부당성과 식민통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강변하기 위해 일본이 사용한 것은 종교적 이미지와 논리였다"며 "일본이 이토를 단순히 ‘영웅화’ 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성화’하는 종교적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점은 흥미롭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토에 대한 과대 과장을 통해 영웅화를 넘어 신성화를 도모하고, 안중근에 대해서는 날조와 왜곡을 통한 미신화를 펼친 <서울신문>의 의도적인 작업이 성공한 이유가 "단순히 통감부의 뛰어난 전략 및 전술의 결과로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며, "당시 천주교회의 정치적 타협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권정 교수는 "천주교회는 거대한 통치 권력으로 등장한 일본을 대표하는 이토를 죽인 이가 천주교인이었음에 당황해 하면서 안중근을 천주교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며, 이는 당시 천주교를 대표하는 뮈텔주교가 계속해서 "안중근이 천주교인이 아님을 주장했던 것"과 맥락이 연결된다고 보았다.

제도권 교회에 실망한 안중근, 제도권 교회의 신앙과 개인 신앙 구분해..

끝으로 김 교수는 안중근이 일본의 식민정책의 합법성을 부인하기 위해 교리를 인용하거나 종교에 호소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개인적으로 이토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의병장의 이름으로, 개인적 원한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의 행동으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고, 천주교 신앙을 통해 민족적 고난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고, 이를 통해 위로를 얻고, 내적 동력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종교적 이유만으로 그를 죽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제도권 교회로서 천주교회에 대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종교에 호소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안중근은 이미 "일제와 정치적 타협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제도권 교회에 대해 더 이상의 미련을 포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제도권 천주교회에 대해 여러차례 실망을 거듭했지만, 끝까지 개인적 신앙은 포기하지 않았다며 "안중근은 제도권 교회 신앙과 개인 신앙을 구별하여 접근했다"고 평가했다. 곧 안중근은 "제도권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고통당하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책무를 다하면서도 천주신앙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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