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사진/한상봉

저녁 밥 짓느라 다소 분주한 시각에 같은 본당에 다니는 한 자매가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그거 신청했어요?”
“뭘?”
“아이 그거 있잖아요, 아이들 첫영성체반~?!”

나는 그가 ‘그거’ 신청했냐고 물었을 때 능청떨고 뭐냐고 되물었지만, 사실 나는 그가 알고 싶은 게 뭔지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가 둘 있는데, 둘째가 이제 첫영성체를 준비할 즈음인 열 살이다. 한 달 전쯤일까? 그 날도 그는 내게 전화를 해서는 본당에 첫영성체 교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집 둘째와 동갑내기인 우리집 막내도 첫영성체 교리를 시킬 건지 어떻게 할 건지 여부를 물어왔다.

얘기인즉, 그는 본당에서 주중 매일 세 시간씩 1개월 집중코스로 첫영성체 교리를 한다는데, 학기 중에 그렇게 시간을 내라는 건 요즘 아이들 상황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것 아니냐고 내게 의견을 타진해 온 것이다. 학교가 끝나면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아이도 있고, 또 피아노나 미술, 그리고 영어 혹은 수학 학원 등을 다니는 게 일반적인 현상인데, 첫영성체 교리를 들으려면 꼼짝없이 한 달간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된다 했다. 그가 한 달간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지만, 고민 끝에 그는 ‘아이가 원해서’라는 각주를 달며 첫영성체 교리에 등록했다고 오늘 친절하게도 경과보고까지 해주었다.

그가 아이들 첫영성체 교리에 발끈하니 새삼스럽게 몇 년 전 어느 본당에서 있었던 첫영성체 과정이 떠올랐다. 그 본당도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교리공부를 하고 저녁미사까지 드려야 첫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교리는 주로 주입식으로 진행되었다. 첫영성체 교리 기간 동안 기도문만이라도 확실히 외우게 해야겠다는 신념인지, 이때 아니면 다른 때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인지, 문자 그대로 기도문을 외우게 하는 일에 치중해 있었다. (사실 확인을 해 보진 않았지만, 거의 모든 성당의 첫영성체 교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주입식과 암기식의 첫영성체 교리가 진행되는 한 달 여 시간 동안 아이들은 성당에 4시에 와서는 미사를 마치고 8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결국 이 강제성은 교리가 끝나갈 무렵 한 아이와 그 엄마에 의해 폭발해 버렸다. 그 결과 남은 기간 동안 미사참례는 개개인의 자유에 맡겨졌다.

난 오늘 내게 전화한 자매처럼 아이들 일상을 무시한(?) 본당의 교리시간표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나치게 주입식인 형태는 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기도문의 뜻과 깊이를 알기에는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단순히 그것들을 암송하게 하고, 해와 달은 몇 째 날에 만드셨지 하는 식의 교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쁨이나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영성체는 단순히 밀떡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도 예수처럼 남에게 밥이 되고 생명이 되는 삶을 만들어내겠다는 신앙고백이다. 우리 어른은 그렇게 영성체를 해야 하고 또한 아이들에게 그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체 교리는 성체가 단순히 예수님의 몸이고 성혈은 예수님의 피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을 말해 주어야한다. 

교리실 안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기도문 달달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이면 어떤가, 교실 밖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 형편이 된다면 시설을 찾아가 외로운 할머니들 손과 발을 주물러 드릴 수도 있겠고, 자기들끼리 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도 해 볼 수 있겠고, 책 읽고 서로 느낀 점을 나누어 볼 수도 있겠다. 첫영성체 예식에 입는 새하얀 드레스나 멋진 양복을 살 돈으로 차라리 그 돈을 모아 가난한 마을 도서관에 책을 사 줄 수도 있겠다. 이 안에서 아이들은 분명 살아계신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교회가 가르쳐주는 더불어 산다는 게 뭔지 더 쉽게 느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너무도 획일적이고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편하게 첫영성체 교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을 일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현재의 아이들에게 세상과 동떨어진 교육을 해서야 되겠는가. 첫영성체 교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교회 사람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그 시간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수없이 많은 예수를 만나게 하고 나 또한 예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첫 시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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