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0월 25일자 2669호 <가톨릭신문>과 1040호 <평화신문>이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니

성경 중에서 잘 안 읽혀지는 성경이 요한묵시록이다. 전례 안에서 만날 기회도 적고, 묵시문학 표현이 비현실적(?)이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안에도 새길 말씀이 나름 있다.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3,14-16)

성경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신학적인 주해와는 별개로 각자가 각자의 처지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말씀의 은혜이기도 하다. 매번 위에 인용한 묵시록의 구절에 이르면 여지없이 눈앞에는 교회언론을 포함한 국내 언론이 처한 딱한 현실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느낀다. 물론 언론 종사자들이야 언론에 대한 의무와 당위성, 그 소임의 막중함 등에 대한 가치우선보다는 소시민이 가지는 밥벌이로서의 직장과 거기서 파생한 업무의 연장이 더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업무를 바라보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지면에 숨을 불어 넣어야

교계신문들은 일반신문들에 비해 고정꼭지가 많은 편이다. 그러기에 신문보도가 주는 긴박성은 줄어들고 매번 판에 박은 듯이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지면이 정체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그것에 대한 제작자들의 고충은 공장(신문사)이 제품(신문)을 만들 수 있는 재료(기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이기도 하다. 일간신문의 경우 하루 취급 꼭지 수량이 서울지의 경우 200~250여, 지역지의 경우 130~150여 인 점을 감안한다면 교계신문들은 주간신문임에도 교회라는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혀 그 재료의 빈곤을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교계신문이 16개 교구를 중심에 두고 전하는 소식이야 독자들로서는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신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사설과 칼럼 그리고 특집기획 기사이다. 그 중에서 특집기사류의 비중은 현재의 교계신문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러기에 눈길 가는 지면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독자들이 일회성으로 보고 지나갔던 단순 소식에 대한 신문사의 ‘재가공의 공력’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재료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인원 혹은 예산을 비롯한 여건의 부족과 함께 보도범위에 대한 지나친 한계가 주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느슨한 인터뷰

<가톨릭신문>이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면특집기사를 이번 주 12면에 실었다. “쇄신·반성은 필연이자 시대의 요청”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흥미롭게도 안중근의사와 나누는 가상 대담이었다. 먼저 그 아이템이 신선했다. 기자는 브라질 열대 우림 파괴를 막기 위한 국제 행사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안중근에게 7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이 대목에서 지금은 폐지된 KBS의 ‘단박인터뷰’가 생각났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나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이 모두 서로의 긴장감이 보이는 편집 덕에 한때 세간의 눈길을 잡아맸던 프로였다. 그러나 안중근과의 쉽지 않은 대담을 만든 기자는 핵심을 애써 피해갔고, 인터뷰에 응한 안중근은 시대를 건너뛰었음에도 좀처럼 긴장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느슨한 인터뷰는 가상대담기획이 아니더라도 매번 실제 인물과의 인터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취재기자 혹은 편집기자는 다섯 번째 질문과 연관된 “쇄신·반성”이라는 안중근의 답변을 기사 제목으로 뽑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넘겼지만 그것으로 안중근이란 주제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아니 너무 순했다. 무엇에 대한 쇄신이며 누구의 반성이란 말인가? 자기검열에 충실하면 기사의 생명력은 짧을 수밖에 없다. 힘들여 만든 기획이 살려면 읽는 맛이 조금 더 깔깔해져야 한다.

모든 사제는 나름 훌륭하다

<평화신문> 역시 특집기획기사를 통해 많은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번 주만 해도 전면에 가까운 특집기사가 여러 꼭지다. 이를테면 생명의 문화 공동기획,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의 사제들, 주교회의 2009년 가을 정기총회 해설, 전교의 달 특집, 성 베네딕도회 한국파견 100돌 공동기획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의 사제들’은 의미 있는 기획이기도 하고 독자들이 미처 모르고 지냈던 사제들을 소개시켜 주는 좋은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 기획 안에는 특별히 ‘나의 멘토 사제’를 소개하는 꼭지가 마련되어 있다. 이번 주 자신의 멘토 사제를 소개한 신부는 글의 시작을 이렇게 했다. “내게 멘토 신부님은 어느 한 특정 신부님이 아니라 모든 신부님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부님은 나름대로 훌륭한 면을 지니셨고, 그 하나하나가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다. 이런 사제들의 마음을 미리 알아차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기획이 읽히려면 깔깔한 맛이 필요

애초의 기획에서 ‘한국의 사제 열전’과 함께 사제들이 소개하는 교회 바깥의 스승 혹은 멘토가 연재되었다면 교회에 국한된 기획을 넘어 좀 더 다이내믹하게 사제들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기획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제의 해’ 기획이 안으로 닫힌 기획이 되기보다는 밖으로 열린 기획이 될 때 ‘사제의 해’ 주제가 좀 더 교회 안팎으로 회자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6월까지 진행하는 ‘사제의 해’. 이런 기획도 역시 깔깔해야 읽힌다.

김유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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