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0월 18일자 1039호 <평화신문>과 2668호 <가톨릭신문>이다.

▲사진/한상봉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

전교의 달과 전교주일을 맞아 교계신문들은 주제에 걸맞은 특집기사를 기획했다. <가톨릭신문>은 1면 톱으로 이웃종교인 ‘정교회’ 초대 한국대교구장의 인터뷰기사를 파격적(?)으로 편집하여 신선함이 더했다. 이어 교황의 담화문과 함께 ‘복음의 행복 느끼고 전교에 앞장서자’는 사설을 실었다. <평화신문> 역시 1면 톱으로 전교주일에 맞는 국외선교를 배치했으며, 교황의 담화와 전교의 달 특집을 9면에 편성하고, ‘전교 대상을 세계로’ 사설을 실었다.

교회가 전교 혹은 선교라는 과제에 쏟는 노력은 중요할 뿐 아니라 마땅한 일이기도하다. 매일처럼 거행되는 미사의 마무리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다짐이고, 예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을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당부로 그리스도인들은 되새기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늘 ‘방법’에 대한 것이다. 예수 승천 직후의 선교방법과 21세기 선교방법이 같을 수 없는 것이며, 선교에 사용하는 용어 또한 사는 모습의 변화만큼이나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모범과 거리선교

<가톨릭신문>은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온 정교회 성직자가 했던 한마디를 화두처럼 1면 톱 제목으로 뽑았다. “모범 보이며 사는 것이 전교”가 바로 그 말이다. 대주교인 그가 선교에 소극적인 의미로 그 말을 했을 리 없는 것이고, 선교사인 그가 그의 정체성을 잃어서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물론 정교회 대주교가 말한 것이 전교의 전부이며 해답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며 많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의 선교론과 함께 <가톨릭신문> 은 사설에서 개인적 차원의 닫힌 신앙이 결국 전교에 대해 소극적인 원인으로 꼽았다. 사설은 이어 “복음화 활동이 신자수 늘리기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신자 수 증가에 비판적인 태도 자체가 복음화 사명을 위축시킬 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흥미로운 진단도 곁들였다. 무엇보다 사설이 사용한 “스스로의 복음화”라는 용어는 동시대의 교우들에게 더 접근해야 할 숙제처럼 보였다. <가톨릭신문>의 2면에는 한국가두선교단의 선교연수 소식인 “세상구원 위해 거리로 나갑시다.” 기사가 이어지며, 현재 한국교회 안에는 다양한 선교방법이 존재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선교는 시혜가 아니다

<평화신문>은 12개 교구와 여러 수도회가 애를 쓰고 있는 국외선교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특히 50여명이 넘는 교구소속 선교사제들이 힘든 여건 하에서도 점차 늘고 있는 것을 바람직하게 평가했으며 한시적 파견일 수밖에 없는 교구소속의 한계를 아쉬워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국외선교하는 것에 대한 정체성은 모호했다. 도움을 ‘받은 교회’가 이제는 ‘주는 교회’로 가는 역할에 방점을 찍은 것은 학계와 교회에서 조금 더 연구할 대목으로 보였다. 어쩌면 선교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에게 베풀어 주는 의미였던 것은 지나간 시절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평화신문>은 사설에서도 ‘전교의 세계화’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이어진 9면의 특집에서는 교황청 전교기구의 하는 일과 함께 현재 에콰도르 과야길교구에서 23년째 선교사제로 사는 한용완 신부의 말을 직접 전했다. 한 신부는 거듭해서 한국교회가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를 거듭 강조했다. ‘주는 것’과 ‘나누는 것’은 단순한 글자차이를 넘어 미묘한 간격이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한 복음 선포를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되새기는 한 주간이다. “모범보이며 사는 것이 전교”라는 말과 “세상구원 위해 거리로 나갑시다.”란 또 다른 실천의 모습과 ‘스스로의 복음화’와 ‘나눔으로서의 선교’가 우리 발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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