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도대체 어디서 연극을 할 것인가? 아니.. 궁극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불후의 소설을 써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마저 감동시켰던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 지겹다. 이름이 길어서 지겹고, 그들의 무수한 명작과 고전들 중 어느 하나도 작금의 이 나라를 설명하지 못함이 지겹다. 또한 다가오는 여름이 정말 지겹다. 아무튼... 나는 도대체 어디서 연극을 해야 하나?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거의 나의 운세를 좌우 한다고 나 스스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노동한 씨에게 나는 나의 그 존재론적 질문을 질문했다.

“나는 연극이 하고 싶소.”
“그럼 하시면 되죠.”
“농담 하시오? 대학로에서 가장 싼 극장 대관료가 하루에 최소 사 오십 만원이오. 게다가 아무리 사랑하고, 믿고, 아끼는 후배라 할지라도 개런티를 주지 않는 한 그들은 나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할 기회를 주지 않소. 따라서 개런티로 최소 칠팔백은 준비해야 하오. 그 뿐인 줄 아시오? 의상에 무대, 소품에 음악...”
“잠깐! 그런데 왜 내가 그 말을 듣고 있어야 하지요?”
“당신이 나한테 연극을 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군요. 분명히 저는 당신에게 연극을 하면 될 거라고 얘기했지요...”
“그러니 그 말에 당장 책임을 지시오.”
“그래야겠군요... 어쩌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지?”
“내가 연극을 할 수 있는 곳을 당장 점지하시오.”
“왜. 태국은 이제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맞다. 마음에 맞는 후배와 함께 태국의 보라카이 섬에서 술집을 하기로 했던 적이 있었다. 우선 그 곳의 저렴한 부동산 단가와 식비, 끊이지 않는 관광객, 따라서 결코 손해 볼 성 싶지 않은 장밋빛 손익계산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해먹에 누워 빈둥거리면서 온 몸을 간질이는 해풍을 맞으며 낮이고 밤이고 퍼질러 자다가 석양이 그 엄청나게 아름다운 머리칼을 마냥 휘날릴 때 쯤 하나 둘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는 세상 이야기와 그 연극적 상황, 말하자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상황에 홀딱 반한 나머지 구체적으로 이민 수속 절차를 밟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 때도 노동한 씨가 내게 용기를 주었더랬다. 그러나...

“나를 약 올리는 거요? 바로 그 다음해 쓰나미로 수 만 명이 죽었지 않았습니까? 태국도 그 영향권에 들었단 말이오.”
“그랬군요. 그럼 이제 어쩌지요?”
“그러니 바로 당장,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내가 연극할 곳을 점지해 주시오. 나는 당신 말을 듣고 태국에 갔다가 물귀신이 될 뻔한 사람이란 말이요.”
“사실... 저는 당신에게 태국에 가라고 강요한 적은 없습니다만...”
“강요가 별건 줄 아시오? 불확실성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얼굴에 포스를 마냥 아로새기며 자신 있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강요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는 법이요.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에게 연극할 곳을 점지해 주시오. 나는 연극이 하고 싶어 미치겠단 말이오.”
“관객이 꼭 많아야 합니까?”
“아시지 않소. 언젠가 내가 출연하는 공연(잘 아시겠지만 그 공연은 그래도 흑자를 기록했었지요)이 돌아가고 있던 어느 목요일, 나는 두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었소. 배우는 모두 여섯 명이었지요. 되게 쪽팔렸었소. 설마 그보다 더 쪽팔리기야 하겠소?”
“9명을 위한 술집을 하시오.”

그리고 노동한씨는 뿅하고 사라졌다.
이후 나의 꿈은 ‘9인용 식탁’이라는 오뎅 바를 차리는 것이 되었다.
아주 꾀죄죄한 뒷골목 어느 허름한 건물 귀퉁이, 바로 옆에는 70년대식 전봇대에 백열등이 가로등 구실을 하고 있고 문은 미닫이 문인데 나무틀과 간유리로 되어 있는 그런 문이어야 하고 오뎅을 팔기는 하지만 전혀 니뽄필이 나지 않는 구수한 분위기여야 하기 때문에 가다랭이와 다시마가 아닌 사골로 육수를 낼 것이며.... 이런 쓰가발...... 사골... 사골... 광우병....

이명박과 그의 정부가 나의 소중한 꿈을 앗아가게 생겼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 마음대로 웃으라 하자.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다. 나의 꿈은 진정 귀중한 꿈이며 결코 장난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니까. 나는 9인용 식탁을 차려 놓고 그 곳에 쓴 소주 한 잔을 하러 오는 가난한 양반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생생한 연극을 할 계획이었다. 그들에게 얄팍한 가다랭이 국물이 아닌 걸쭉한 곰국에 오뎅을 담아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겨울을 희망으로 녹이려 했었다. 그들의 통한을 같이 울고 그들의 분노를 같이 부릅뜨고 그들이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 곁에서 굿 장단을 쳐 주려 했던 나의 계획이 그 뱁새눈의 벼멸구와, 안하무인이기는 똑 제 두목을 닮은 그 일당들의 허접한 소위 외교인지 지랄인지 때문에 온천에 떨어지는 함박눈 마냥 슬프게 날아가게 생겼다.

이 개자식들 그대로 두고 보면 큰일 나겠다. 뭐라도 하자. 나이 먹었다 한탄하지 말고 제발 뭐라도 하자 이 영국아....
고등학생의 희생과 죽음으로 역사를 끌어나가는 것은 이미 사일구 하나로 충분히 족하지 않은가...

 

/변영국 2008-05-09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