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트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읽고 주거문화를 생각함
-겸손과 여백과 침묵, 그리고 자연스러운 공간-집

서울을 빠져나가 외곽도로를 달리다보면 뭉텅뭉텅 잘려나간 산자락에 버티고 있는 아파트 군락이 여간 흉물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다. 한 평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 건물을 들어 앉히기 위해 공유면적을 최소화하다 보니 다닥다닥 밀집해 있는 건물들은 보는 눈을 짜증나게 한다. 오직 개발의 효율성과 수익의 극대화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건축물들은 자연을 압도한다. 배경의 산야와 근사하게 어울려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해내는 건축물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스코트 니어링
‘돌집은 제가 서 있는 땅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또한 둘레 풍경과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데 모자람이 없다.’라고 말한 이는 <조화로운 삶>(보리)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이다. 나는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데’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으면서 서산 개심사의 심검당(尋劍堂)을 떠올렸다. 자연 속에 도드라지지 않게 삶의 공간을 살짝 들어 앉히는 동양의 지혜와 미학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주는 곳이 심검당이었다. 뒤틀린 나무는 뒤틀린 대로,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대로 천연덕스럽게 구조물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어느 하나 내치거나 버리지 않겠다는 투였다. 성과 속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스코트 니어링은 집을 지을 때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모양과 기능을 모두 다져서 집의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 집의 안정감과 조화는 겉모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집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 니어링의 생각이었다. 집은 꼼꼼히 설계를 해서 쓸모에 맞도록 해야 하고, 필요 없는 재료와 노동을 들이지 않고서도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졌던 니어링이 서울의 건축물들을 둘러보고 소감을 피력했다면 어땠을까. “Terrible!(끔찍하다.)” 정도는 아니었을까.

종교적 건축은 많지만 종교 건축은 없다

둘째, 집은 둘레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주변의 일부가 되는 겸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일부로서 마치 자연 속에서 자라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저택들은 이런 미덕을 거부한다. 오직 저의 위용을 뽐내는 데 골몰한다. 심지어 겸손의 미덕을 몸소 보여주어야 할 종교 건물이 실제로는 이런 미덕을 앞장서서 거부한다. 이름 있는 교회들을 보라. 그것들은 하늘을 찌른다. 바벨탑의 교훈을 잊은 지 오래다.

‘빈 자(貧者)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은 말한다. “종교적 건축은 많지만 종교 건축은 없습니다. 첨탑만 있다고 교회는 아닙니다.” 마산성당, 경동교회, 청주박물관, 수졸당, 영동제일병원, 대학로 문화공간 등 선비 정신과 청빈의 전통을 건축물에 구현하려고 하는 승효상은 그의 저서 <빈자의 미학>에서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갖은 건축적 장광설로 부의 위용을 과시하는 건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라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까치)의 한 구절이 섬뜩하게 상기된다.

셋째, 집은 되도록 그 고장에서 나는 재료들을 써서 짓는 것이 좋다는 것. 집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둘레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다른 곳에서 가져오기보다는 그 고장에서 나는 재료를 쓰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건물의 외벽을 값비싼 수입산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압구정 로데오 거리, 어디에도 집의 본질을 숙고했던 흔적은 없다.

그 집으로 집 주인을 알 수 있어야

넷째, 집의 생김새는 거기에 사는 사람을 표현해야 하고, 그 집으로 집 주인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집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내 지론이라면 지론이다. 동물의 박제로 장식된 집의 주인이 동물애호가일 수는 없고, 일본도로 장식된 집의 주인이 인문주의자일 수는 없다.

요란한 장식물이 없이 소박하게 꾸며진 방에 들어서 이 방의 주인이 노장(老莊)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닌가 상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자연과 어울려 마치 자연 속에서 성장해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전통사찰을 보노라면 화엄의 정신, 상생(相生)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은 경전이 아니라 오히려 사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런 전통 사찰의 미덕도 점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리석으로 외벽을 꾸민 수덕사의 건축물 어디에서도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정신, 화엄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사찰이나 선방(禪房)에 필요한 것은 침묵이지 장식이 아니다. 절은 침묵의 공장이고 선(禪)은 면벽(面壁)의 정진이 아니던가.

▲실상사 법당 옆 감나무가 실하게 열매를 달고 있다.(사진/한상봉)

지극히 교묘한 것은 졸렬하다

<조화로운 삶>이 소개하고 있는 농부 작가, 미첼(D.G Mitchell)의 한 마디는 두고두고 음미해볼 만하다. “어떤 돌도 망치로 다듬어서는 안 되며, 되도록 이끼가 끼고 비바람에 시달린 모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극히 교묘한 것은 졸렬하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가 서양인의 지혜를 빌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이 지혜로운 서양인들이 노자와 장자의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니어링은 말한다. "우리는 방에 있는 판자마다 다른 빛깔을 내도록 했다. 벽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더해갔고, 빛깔들이 어우러지면서 몇 백권이나 되는 책에 훌륭한 배경이 돼 주었다"

집의 연륜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일찍이 이어령이 그의 수필 「삶의 광택」에서 간파했듯이, 광택은 포마이카 책상의 인공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없는 문지름의 결과, 소재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그 은은한 빛남이 아닐까. 역사가 결여된 빛남은 공허한 반짝임에 불과한 것, 음악이든, 건축이든, 회화이든 하나의 빛남을 위해서 역사는 필요한 것이다.

자연스러움, 여백과 침묵의 공간

<조화로운 삶>은 또 한 명의 현자를 소개한다.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이루려는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자연히 모든 장식물을 없애고, 고가구나 카펫이나 공중에 매다는 것 따위의 거의 모든 장식품을 거부했다. 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쓸모 없거나 허울뿐인 장식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날렵하게 내달리는 분명한 선과 어느 모로 보나 깨끗한 벽은, 장식 달린 커튼, 그림이 있는 벽지, 기계로 조각한 가구, 공들여 만든 그림 액자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훨씬 더 좋은 배경이다.”

<작가수첩>(책세상)이 전하는 까뮈는 스스로 번잡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며칠이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여관방에서 쉬었다고 한다. 우리를 쉬게 하는 것은 여백이고 침묵이다. 집이 그런 여백과 침묵의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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