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교회]10월 11일자 교계신문들은 추석으로 인한 휴간이다.

 

침묵에 대한 참회

언론이 스스로 자신들의 침묵에 대해 참회를 하는 중이다. 물론 교계언론이 아니라 세상의 언론이 하는 일이다. 언론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침묵의 카르텔’(<한겨레> 10월 2일)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부끄러운 언론’(<조선일보> 10월 1일)이란 회초리를 들었다. 두 신문 모두 같은 사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교계신문이 휴간이기에 교회와 교회를 둘러싼 언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시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앞에서 말한 내용은 9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촛불정국이었던 작년 6월 이후 1년 3개월 여 만에 기자회견을 했다. 이번에는 머리 숙이는 회견이 아니라 2010년 G20 정상회의 유치에 대한 자랑을 겸한 기자회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 스스로의 입으로 고백하는 부끄러움과 침묵이란 무슨 의미였을까?

우리 사회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조선일보>의 10월 1일 사설이다. “대통령회견은 대통령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말하는 자리인 동시에 국민이 대통령에게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언론이 국민을 대신해 물어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것이 언론사 기자들의 소임이다. 그러나 청와대 기자들, 바로 한국 언론은 이날 그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국민을 대신해 대통령에게 물어보아야 할 기자들이 청와대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여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국민 모두가 궁금해 하는 세종시 문제를 대통령에게 단 하나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언론 직무의 포기였다. 조선일보도 그 잘못된 한국 언론 속에 포함된다.”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한겨레>의 10월 2일 사설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는 대답하기 껄끄러운 문제는 건너뛰고,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태도를 유감없이 드러낸 셈이다. 청와대도 잘못이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아들인 언론의 책임은 더 크다. 국민이 궁금히 여기는 것을 물어야 할 소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다. 한겨레 역시 이런 잘못에 일조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이런 관행이 쌓이다 보니 청와대가 더욱 언론을 쉽게 여기게 된 측면도 있는 것이다.”

교계신문의 자기성찰은 있는가

이쯤해서 교계신문을 돌아보자. 교회 안의 수많은 일들에 대한 기자들의 ‘침묵’은 없는가? 두 신문이 이심전심으로 하는 ‘침묵의 카르텔’은 없는가? ‘부끄러운 언론’의 모습은 결코 없으며 그런 일에 대한 자기비판의 용기는 사라진 것인가? 21세기 한국인의 많은 수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종교, 어느 종교보다도 급속히 교인이 늘어나는 종교, 세계교회 안에서도 적잖은 자리를 차지하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언론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교회적이며 동시에 복음적인지 그리고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의 언론보다 오히려 예리한 자기성찰이 교계신문의 몫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500여 만 명이 넘는 천주교인이다. 16개의 교구와 1500여 성당, 30명이 넘는 주교단, 4000여 명의 성직자와 10,000여명의 수도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체이다. 30여개가 넘는 의료기관과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300여개의 교육기관을 보유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기도 하다. 언론이란 소임을 부여 받은 두 교계신문의 할 일이 산더미처럼 보인다. 불러주는 대로 혹은 물어보아 달라는 대로 해서는 언론의 침묵이 깊어갈 뿐이다.

교계신문이 관심 밖이거나 침묵할 때 늘어나는 것은 세상의 비아냥거림과 모멸이다. 얼마 전 김지하 씨가 <조선일보>에 ‘천만 원짜리 개망신’이란 글을 기고하자, 진중권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그에게 “왜 말년을 추하게 보내야 하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러자 천주교 신부인 박홍 씨가 <평화방송>에 출연하여(9월 29일) “(진중권 씨의 발언은) 그냥 개가 짖는구나 이 정도로 들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한겨레>는 10월 9일 ‘세상읽기’에서 이번 일과 관련하여 “사랑과 배려를 말해야 할 신부님은 공공 매체를 통해 다른 이의 발언을 개 짖는 소리라고 매도했다. 그가 종교인이 아니거나 사적인 언급이었다면 몰라도 사람 말을 개소리로 듣는다는 신부님의 발언이 공공연히 매체를 타고 또 이런 발언을 교계 차원에서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종교인의 정체성을 망각한 추한 모습이자 동시에 자체 정화도 못하는 서글픈 종교계의 모습이다.”라는 모멸을 천주교회와 당사자에게 안겨줬다. 발언당사자와 ‘자체 정화도 못하는 서글픈 종교계’는 외면할지라도 천주교인이란 교적하나 만으로 평신도들은 얼굴 들기가 부끄럽다.

침묵의 마술에서 풀려나야

취재대상의 입이 아니라 손과 발을 쳐다 볼 줄 알아야 한다. 보도의 초점은 취재대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스스로 정한 침묵의 마술에서 풀려나는 것이 교계신문의 정체성 회복이자 교회의 퇴행을 부르는 성역에 대한 언론의 희생이며 마주봄이다.

김유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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