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백성이란 누구인가"

이승훈, 윤지충, 권상연, 정약종... 우리 교회의 혁혁한 순교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남인이었다. 말하자면 당대의 진보 야당 인사들이었으며 정조대왕이라는 걸출한 임금 아래서 그들은 잠깐이지만 권력을 얻은 적이 있었고 순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들이었다.

나는 몹시 궁금하다. 과연 당시의 민중들은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대개 우리는 그 순교자들의 삶이 매우 정갈했고 성품 역시 인자하여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는, 말 그대로 성인의 삶을 살았으며, 천주를 향한 그들의 갈망은 당시 백성들의 절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거니와 그 순교자들을 증오하고 미워하여 없애려 혈안이 되어 있는 부류는 오직 탐관오리들과 썩어 빠진 왕실이었을 뿐 대개의 백성들이 그 순교자들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들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소위 유교적(사실은 그저 폭압적인) 질서에서 당대 백성들이 자유로웠을까? 그 질서에 세뇌되고 연단되어, 순교자들을 반역자로 보는 백성들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닐까?

액맥이로 뽑혀 무수리가 된 고대수(본명은 아니고 그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여자라는 의미의 별명인 듯하다)는 명성황후의 몸종이었다고 한다. 무수리가 되기 이전부터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와 함께 비밀스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는 얘기가 전하는 걸로 보아 아마도 나름의 혁명을 꿈꾸는 천민(혹은 상민) 계층의 여성이었던 듯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창덕궁의 한 별전에서 폭약을 터뜨려, 고종 내외를 경우궁으로 파천하게 하여 김옥균의 정변(갑신정변)을 성공시킨 장본인이 바로 고대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분을 없애자는 김옥균의 주장에 깊이 동조하여 벌인 일이라고 하니 어쩌면 고대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혁명가로 불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일본으로 망명도생한 김옥균 일파와 달리 고대수는 잡혔고... 죽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고대수는 대역죄인이라는 명패를 목에 걸고 육의전을 지나 형장으로 향했다. 성난 군중들이 몰려들어 쥐어뜯고 할퀴어 옷이 찢어졌고 수구문을 지나면서는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앞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마폭이 떨어져나갔다. 왕십리 청무밭에 이르러 군중들이 빗발치듯 돌멩이를 던지니 머리가 깨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선혈이 낭자했으며 마침내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군중들이 ‘성이 났고’ ‘쥐어뜯고’ ‘돌을 던져’ 죽였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고대수를 죽일 필요는 없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고대수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제 나라 하나 건사하지 못하여 일본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책임을 져야 마땅한 고종이 죽었을 때는 인산인해를 이뤄 눈물을 흘리던 그 백성이, 일본에 붙었다 청에 붙었다 하며 자신의 생각대로 나라를 주무르려 했던 명성황후가 죽었을 때는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던 그 백성이, 목숨을 걸고 신분을 타파하려 거사를 벌인 고대수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

그 백성들에게는 그렇게도 ‘봉건군주제’와 ‘신분세습제’가 기꺼웠고 자랑스러웠으며 무조건 지켜야 하는 그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때리고 던지다 보니까 그저 제 흥에 겨워 도무지 그만두지를 못했나? 혹시 그 때의 그 백성들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돼지의 술수에 놀아나는) 각종 멍청한 동물들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말이다...
그런 백성들이 말이다...
유교적 질서와 정확히 맞은편에 서 있는 천주교 순교자들을...
임금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 천주교 자체를...
고대수보다는 좀 낫게 받아들였을까?
아닌 듯하다. 아마 아닐 것이다. 결단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저 ‘천인공노할’ 대역죄인이었을 뿐이다. 아마 그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수많은 백성들은 마치 고대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폭행을 가했을 것이다. 순교자들은 어쩌면 형장으로 가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기 다반사였을 것이다.

백성은 강하고 백성은 하늘이다. 이건 믿어야하는 정언적 명제다.
허나 백성은 때로 천박하고 휘둘리기 잘하는 존재다. 이건 진리다.

나는 요즈음 세기 초의 독일이 왜 그렇게 쉽사리 나치에게 온 나라를 맡겼는지 공부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의 나라. 그 재미없는 브레히트의 서사극들을 온 백성이 진지하게 감상하는 똑똑한 나라 독일이 왜 그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에게 온 나라를 진상하고 그것도 모자라 600만 유태인을 죽이는 걸 지지하고 동조하고 묵인했는지 꼭 알고 싶은 것이다.

그걸 모르고서 어떻게 작금의 대한민국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갑신정변의 이름 없는 주역-고대수(顧大嫂, 생몰년 미상)

갑신정변(1884)은 개항이후 거세지는 외세의 압력 속에서 조선의 개화를 시도하였던 사건이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갑신일록』에는 고대수라는 별명을 가졌던 궁녀에 관한 기록이 몇 줄 남아 있다. 그녀는 갑신정변 당시 정변세력을 도왔던 인물이다. 궁녀라는 신분으로 정변의 추진에 적극 협조를 하였던 이 여인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친청파를 제거하고 국왕을 끌어들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들에게는 국왕 및 반대파들의 동향을 수집·분석하여 대응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환관 3인은 고종이 동태를 파악하는 역할을 했으며, 궁녀 고대수는 친청파인 민비 쪽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갑신일록』에 그녀는 궁녀 모씨(某氏), 즉 궁녀 아무개로 기록되어 있다. 정변 당시 그녀의 나이는 42세로, 몸이 건장하고 힘이 세어 남자 대여섯 명을 너끈히 당해 낼 수 있어서 '고대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고대수라는 인물은 중국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사내 20여 명을 거뜬히 감당할 힘을 가졌던 양산박의 108두령 중 한 명으로,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별명은 임오군란(1882)으로 민비가 쫓겨났을 때 가까이에 있으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성난 군중들이 민비를 죽이려 하자, 민비는 충주까지 피난을 갔다. 고대수는 민비의 곁에서 그녀의 힘과 기개를 발휘하여, 민비의 안전을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환궁하여 민비의 총애를 받게 된 고대수는 민비 주변의 정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그녀와 정변세력과의 접촉은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것일까.『갑신일록』에서는 그녀가 정변 10년 전부터 정변세력과 가까이 지내면서 비밀정보를 전했다고 한다. 정변 세력 중 김옥균은 귀천의 차별 없이 모든 이들을 평등한 입장으로 대했으며, 김옥균이 고대수의 비범함을 높이 사 개화당의 일원으로 발탁한 듯 하다. 고대수 역시 김옥균이 지닌 개화사상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념에 공감하며 그와 계속적인 접촉을 가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은 시작됐다. 정변의 성패는 신속하게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국왕을 신변을 자신들의 수중에 확보하는데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창덕궁에 있었는데, 정변의 성공을 위해 고종을 수비에 유리한 경운궁으로 옮겨야 했다. 김옥균은 고종과 민비에게 소식을 알린 뒤 거처를 옮기자고 했으나 민비는 이를 매우 의심했다. 그 순간 창덕궁 근처에 있는 통명전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번졌고, 공포에 휩싸인 고종과 민비는 김옥균의 제안대로 창덕궁을 떠났다.
어떻게 이처럼 시기적절하게 통명전에서 불이 일어났던 것일까. 통명전 화재의 배후에는 바로 궁녀 고대수의 활약이 숨어 있었다. 거사 전 김옥균은 고대수에게 조그만 대나무 통에 폭약을 넣어 가지고 있다가 밖에서 불이 나는 것을 신호로 통명전에 방화를 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여러 인물에게 폭약을 이용한 방화 임무가 맡겨졌으나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폭약의 이용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궁녀 고대수는 계획대로 폭약을 터트려 정변이 차질 없이 진행되게 했다. 그녀의 담대함과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이루려 했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 가담자들은 국외로 도피하거나 대부분 극형에 처해졌다. 그녀 역시 궁중에 숨어 있다 체포되어 일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정변의 참여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자 궁녀'라는 특수한 신분이었다. 그녀는 이미 왕비의 총애를 받는 궁녀로서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조선의 '개화'와 '독립'이라는 이념에 공감하여 정변에 가담하였고, 정변과정에서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궁궐의 꽃'으로 수동적 삶을 살았던 궁인들과는 다른, 자신이 처한 사회를 바라보고 이에 대한 개혁에 동참해 나가는 새로운 궁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숙경 | 고대 한국사 박사수료)




/변영국 200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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