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0월 4일자 2667호 <가톨릭신문>과 1038호 <평화신문>이다.

블로그(Blog)라는 미디어도구가 발명되면서 본격적인 인터넷 논객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블로그란 말은 더 이상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인터넷을 의미하는 '웹(web)'과 자료 또는 일지를 뜻하는 '로그(log)'의 합성어인 '웹 로그(weblog)'의 줄임말”이라고 풀이(브리태니커사전) 하지만 “사이트 운영자가 취재· 편집· 발행을 총괄하는 '1인 미디어' 혹은 '뉴스 게릴라'”라는 점에서 새로운 언론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1인 미디어로 불리는 블로그의 진화는 그동안 신문의 독점적 영역으로 불렸던 '의제 설정력'까지 빼앗아가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블로그의 가장 큰 장점은 기존 언론이 외면한 문제 혹은 지나쳐버린 문제에 대한 '이슈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런가하면 때로 신문 혹은 방송이 블로그의 의제를 쫓아가는 역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교계언론도 이제는 예외가 아니다. 블로그가 교회의 이슈나 의제를 신문· 방송보다 더 빨리 선점하는 일들이 빈번해지고 있다. 물론 누가 누구를 쫓아가든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용을 할 바에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보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블로그는 언더그라운드의 영역이며, 신문은 여전히 힘 있는 자리에 있다.

10월 4일자 <가톨릭신문>의 1면 톱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관련기사는 3면에도 이어질 정도로 그 내용이 만만치 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전제하고 들어갈 것은 이 기사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김상원 신부의 블로그(http:// blog.daum.net/terrasanta)에 9월 11일 올려진 “'주님의 기도 성당' 가톨릭 기도문이 개신교 기도문으로 뒤바뀐 것에 대하여”란 글이 단초가 된 것임이 틀림없다. <가톨릭신문>도 김상원 신부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있다는 점을 기사 본문에서 밝혔지만 기사의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음에도 기사는 직접 취재를 한 모양새로 이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톨릭신문>으로서는 행운에 가깝게 이 기사를 직접 취재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9월 10일부터 일주일간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이 여정은 이번 주 14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에 소개되어 있다. 기자는 이스라엘 관광청이 주최한 ‘갈릴리 국제 관광 마케팅 이벤트’에 참가를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여정 중 특별히 짬을 내어 문제를 야기한 ‘주님의 기도’ 성당을 방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간략하게 기사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사건(?)의 내용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올리브동산에 있는 ‘주님의 기도’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준 장소를 기념하기 위한 성당이다. 그곳에는 각 나라 말로 된 ‘주님의 기도’ 조형물이 벽화형태로 있으며, 한국말 ‘천주교식’ 기도문은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이스라엘을 순례했던 부산교구 당시 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기증했다. 이후 한글 기도문은 그 성당을 방문하는 한국 순례자들에게 큰 긍지를 주었는데 2008년에 이 기도문이 한글로 된 ‘개신교식’ 기도문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 개신교 목사가 등장을 했고, 이런저런 항의를 거쳐 다시 한글 ‘천주교식’ 기도가 벽면에 회복되었지만 원본이 아니었고, 새로 만들었음에도 1997년 이전 기도문이고, 회복된 장소는 원래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이란 내용이었다. 물론 ‘개신교식’ 한글 주님의 기도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공교롭지만 기자 한 명의 이스라엘 취재 길에 날아온 블로거의 ‘의제’에 대하여 <가톨릭신문>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결국 9월 15일 기자는 문제의 성당을 방문하였지만 그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성당 관리인’에 불과했으며, 9월 18일 한글로 된 ‘천주교식’ 기도문이 다시 설치된 것을 이스라엘 교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마도 기자는 일행과 함께 이동해야 했기에 시간적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에 대한 아쉬움은 이미 블로그에 올려진 문제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야 할 것이다. 김상원 신부가 블로그에 올린 9월 11일 이전에 신문사가 이 문제를 알았다면 아마도 이렇게 접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 신부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기사와는 다른 어조로 이 문제에 대한 의문들을 감추지 않았다. “게임에는 룰이 있고 장사에도 상도의가 있습니다”라고 글을 시작한 김 신부는 3장의 사진을 포스팅하며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 (교회일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 교단 출신) 개신교 목사의 요청, 모종의 거래, 분별력 없는 수녀, 카르멜회의 수치”라는 말과 함께 원상 복구를 위한 공문을 보낸 예루살렘 총대주교, 작은 형제회 성지관구장, 카르멜회 총장, 주님의 기도 성당을 관할하는 이스라엘 주재 프랑스 대사관과 해당 카르멜 수녀원의 담당자 실명도 거론했다. 김 신부는 “‘다름’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것이 ‘개신교식’ 기도문이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책임 소재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 그리고 양심, 하느님의 뜻, 용기”에 대하여 담담히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주님의 기도’ 성당에는 우여곡절을 통해 한글판 기도문이 두 개 있다. 「스펀지」에 나올 문제 같은 일에 대해서 교계신문들의 이어지는 보도를 기대한다. <가톨릭신문>의 발 빠른 움직임과 의제설정에 대해 격려를 보낸다. 그러나 최초의 의제를 제공한 블로그 수준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수도회 신부로서 말한 것보다 언론이 보다 심도있게 들어가야 했다. 이럴 때는 역시 기자 정신이 필요한 일이다. 한 기자가 말했다. “신문이라는 전달 수단은 사라져도 뉴스라는 상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신문사는 사라져도 취재를 하고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라는 직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너스!
1.<가톨릭신문>이 1면 톱 제목으로 사용한 “우리말 ‘주님의 기도’ 되찾다”는 지나친 편 가름이다. 개신교식 기도 역시 남의 말이 아니라 우리말일 따름이다.
2. ‘주님의 성당’에 있었던 원판 사진은 <이스라엘 성지>(생활성서사, 정양모-이영헌 공저,1988년) 55쪽에서 볼 수 있다.

김유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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