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 따라 배우기-8] 그리스도교 평화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사목헌장을 통하여 평화 문제에 관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인류는 참된 평화를 찾아서 새로이 회심하여야 하며, 평화의 건설자들은 “하느님이 아들이라 불릴 것이므로”(마태 5,9) 행복하다고 선언한 복음의 메시지가 새로운 빛을 발하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의회는 “진실하고 숭고한 평화의 뜻을 해명하며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고,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에 뿌리박힌 평화를 확립하고 평화의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도록”(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77항) 열렬히 호소한다.

평화는 전쟁부재 넘어 정의의 실현

사목헌장은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당부한 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평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는 한 번에 얻어질 수 없으므로 언제나 꾸준히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상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며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습이며 결실이다. 육화하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임금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시키셨으며, 당신 육신 안에서 미움을 죽이시고,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랑의 성령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부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서 진리대로 살면서(에페 4,15 참조) 참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치하여 평화를 찾아 건설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 폭력을 쓰지 않고 약자에게도 가능한 방위 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을 동일한 정신으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단, 그 방위수단이 타인이나 타 공동체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죄인인 한, 전쟁의 위험이 인간을 위협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하겠지만, 인간이 사랑으로 결합되어 죄를 극복한다면, 폭력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 2,4)고 하신 성경의 말씀이 채워질 것이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78항).

공의회에서는 “전쟁 행위는 모두 다 하느님과 인간 자신을 거역하는 범죄이므로 단호히 단죄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며, 힘의 균형을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군비경쟁도 진실한 평화의 길이 아니며 오히려 전쟁요인만 증대된다고 보았다. 실제로 군비경쟁은 인류의 막심한 상처이며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해치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릇된 희망에 속지 말아야 한다 [...] 현대가 지닌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렇게 경고하면서도 굳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교회는 현대를 향하여, 기회야 좋든지 나쁘든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바오로 사도의 메시지를 전하며, 마음을 고치기 위하여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2코린 6,2)이라고 외치고자 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82항).

도로시 데이와 그리스도교 평화주의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당장에 직면한 것 역시 평화 문제였다. 처음에 도로시는 신문을 발행하고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톨릭일꾼의 집을 방문하고, 대공황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록하고, 집회에서 강연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연좌농성에서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도로시는 노동문제가 발생하거나 부당한 조건에 항거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았다. 이러한 가톨릭일꾼운동의 활동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본당 차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제 세상만사가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인간체험의 중심에 있는 정의와 자유,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실제로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불거진 문제는 ‘평화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다.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스페인 내란, 그리스도인 무장하지 말아야..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도로시 데이의 평화주의는 시험을 받았다. 거의 모든 미국 주교들과 가톨릭계 언론이 반공적이고 친가톨릭적이라고 하여 프랑코를 지지했다. 도로시 데이는 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에서 무서운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에는 반대한다.”

교회의 순교자가 된 신부, 수녀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쓰기를 거부했던 무기를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잡음으로써 그 사람들을 명예롭게 할 것인가?” 묻는다. 그것은 그들의 순교를 허사로 돌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묻는다. “오늘날 전 세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다. 우리 모두는 그 와중에 살고 있다. 솔직하게 우리는 성인을 찾고 있다.”

도로시는 다른 사람들도 스페인의 신부, 수녀처럼 무장을 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악을 이겨낼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계대전 때에도 반전운동.. 전쟁 중에도 적을 사랑해야

가톨릭일꾼운동의 평화주의는 중립노선을 달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탄압하자 뉴욕의 가톨릭일꾼들은 1935년 부둣가로 달려가 독일의 정기여객선인 브레멘호 앞에 모인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독일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호소문을 통하여 “미국의 환대를 원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고,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만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유태인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인종차별과 나치운동의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성 프란치스코가 길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도로시는 전쟁 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로시는 거듭 말했다. “우리의 삶의 법칙은 애덕의 일을 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불타는 아이들의 땅을 위해

마침내 종전이 되었으나 도로시는 기뻐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군국주의는 살아 있었고, 파시즘도 숨어서 존재할 것이다. 전쟁 때문에 원자탄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섬광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파괴되었다. 도로시는 이번 전쟁에서 연합군이 이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자는 전쟁과 죽음이며, 이제 죽음은 인류를 말살시킬 수 있는 무기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 때에도 가톨릭일꾼운동은 더욱 완강히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3년 안에 미군의 숫자가 5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였다. 방어능력이 없는 외딴 마을들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파괴되었다.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신문에 베트남을 ‘불타는 아이들의 땅’이라고 썼다. 유니온 광장에선 가톨릭일꾼 봉사자들이 시민불복종 행위로 징집 등록증을 불태웠고, 이 자리에서 도로시 데이는 전쟁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항거의 몸짓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들을 ‘모스크바 메리!’라고 야유하며 “징집 등록증을 태우지 말고 너희들이나 분신하라!”고 외쳤는데, 몇 주 뒤에 이 자리에 참여했으며 가톨릭일꾼 봉사자였던 로저 르포트가 미국공관 앞에서 정말 분신하였다.

로저는 자신의 몸을 벽 삼아 미국 전체에 들릴 수 있게 ‘아니오’라는 메시지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주교들은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예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추기경은 베트남전쟁을 ‘문명을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바오로 6세 교종의 평화협상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면승리를 요청했다.

애덕활동과 평화주의 분리 안 돼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을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는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렇게 응수하였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주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그분께 직접 해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한편 도로시 데이가 이끄는 가톨릭일꾼운동은 특히 평화주의와 관련해서 교회 안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 글은 1962년에 4월에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라는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이 소속해 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돈 가브리엘 소르테스 아빠스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글을 더 이상 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토마스 머튼은 책의 원고를 한정본 책으로 만들어 비밀리에 돌리게 되었는데, 훗날 바오로 6세 교종이 된 밀라노의 몬티니 추기경도 받아볼 수 있었다. 또한 1962년 12월에는 공의회 토의자료로 교황청에 사본이 들어갔으며, 1965년에 발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인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에 중요한 내용들이 반영되었다.

이를 테면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 받아야 한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80항)고 하였으며, 또한 공의회에서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79항)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사목헌장의 이러한 내용은 이미 1963년 초에 교종 요한 23세가 발표한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해 확인된 것이었다. 이렇게 도로시 데이가 스페인 내란 당시부터 줄곧 견지해 오던 그리스도교적인 절대적 평화주의가 교회 안에 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공산주의와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의 평화주의 원칙은 공산주의들의 문제를 대면하면서도 그대로 관철되었다. 1949년 소련이 원자탄을 성공적으로 폭발시켜 미국 국민을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미국적인 행위에 대한 위원회’의 회원인 리처드 닉슨 하원의원은, 소련의 성취가 미국 내의 ‘간첩’ 때문이라고 처음 말했고, 1950년 2월 상원의원 요셉 매카티가 국무성 직원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고 그 명단도 갖고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이른바 매카티 선풍이 불었다. 이에 미국 연방수사국의 에드거 후버는 “미국의 비밀을 크레믈린에 넘겨준” 간첩을 잡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해 여름 뉴욕에 살던 공산주의자 줄리어스와 에텔 로젠버그가 체포되고 소련에 원자탄의 비밀을 넘겨주었다고 고소되었다. 3년 후 두 사람은 무죄를 주장하며 전기의자에서 죽었다.

당시 미국 정치권은 ‘내부의 적’이 주요한 관심사였다.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평화나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인종차별에 항의하거나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은 색깔논쟁에 휘말렸다. 교사와 공무원은 ‘충성의 맹세’라는 데에 서명을 해야 했고, 공산당에 동조하거나 그런 전력이 있는 사람은 생계가 곤란했다. “괜찮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뿐이다”라는 표어가 전국을 휩쓸었다.

도로시 데이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을 보석으로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칼럼을 통해 도로시는 자신이 공산주의에 입은 빚을 강조하였다. 도로시 데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빌려간 것이라며 양자의 공통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들처럼 국가는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무신론과 폭력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의 말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다른 정치적 방법이 실패하였다고 폭력과 전쟁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나 민주당원, 또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에도 반대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열정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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