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은 나이가 조금 터울이 지는 친구가 두엇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친구가 있으니 이 친구의 이름은 왕택이인데 나보다 무려 세살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트고 지냈다. (내 형이 나보다 세살 위니 참으로 족보 중에서도 개 족보가 아닐 수 없는 일이지만 뭐 별다른 문제없이 우리는 친하게 지냈다.)

아무튼 이 왕택이가 장가를 갔는데 제 나이 스무 살 때, 그러니까 내 나이는 열일곱 살 때였으니, 왕택이 아버지는 이른 잔치에 연방 싱글거리셨고 게다가 술 한 잔 하시고는 춤까지 덩실덩실 추시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인즉 왕택이 처가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는 고등학생이, 그것도 이제 막 고1이 된 녀석이 술을 입에 대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 날 신랑 친구의 자격으로 암튼 무지하게 부어라 마셔라 했던 기억이 난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실 시골 잔치에서는 돌쟁이도 막걸리를 마신다. 따라서 그 날, 엄청난 주량을 자랑한 내게, 일가 어른들은 과연 변씨 집안은 다르다며 고개를 끄덕거리시면서 내 등을 두드려주셨다. 아마도 앞으로 전개될 나의 주당 천하를 은연중 축복하시는 손길이었으리라.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리고 근 이십여 년이 지난, 그러니까 한 칠팔년 전이었나 보다.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벌초를 하러 갔던 나는 불현듯 왕택이가 보고 싶었고 당연히 왕택이를 찾았다. 그리고 역시 왕택이였다.

볏단만 걷어내고 슬레트로 지붕을 댄 제 집 대청에서 막걸리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던 왕택이가 맨발로 뛰어 내려와서는 몹시 취했는지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거리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이게 누구여. 내 친구 대학생 영귀기 아니여?”

참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대학생이라니. 나이가 마흔인데... 아무리 대학교 일학년 때 마지막으로 나를 봤기로.....

하기야 동네를 통틀어, 유사 이래로 대학에 간 사람이 둘인가 셋 밖에 없는 동네라서 과거 왕택이가 내 얘기를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는 것을 나는 안다.

“참 개갈 안 나는 놈이네 그랴. 대학생? 시방 니가 제정신이여?”

“너는 대학생이여. 대학생은 시상에서 제일 높은 겨 임마. 우하하하하하...”

왕택이는 여전히 1970년대를 살고 있었고, 여전히 버스가 하루에 10대도 다니지 않는 내 고향 역시 구태여 초현대적 변태에 동참하지 않았다. 조금은 서글펐고 사실은 미치도록 기뻤다.

‘그래 왕택아. 나는 대학생이다. 지금이야 개나 소나 다 대학생이 되지만 참으로 힘들게 시골에서 대학 간 내가 네 친구다. 즐겨라 즐겨....’

우리는 옛날식을 따랐다. 마루 모서리에 걸터앉아 다리 하나는 댓돌에 대고 한 쪽 다리는 접어서 마루에 올리고 막장에 풋고추를 찍어 씹으며 막걸리를 들이켰고 왕택이랑 동갑인 왕택이 처가 얼굴을 가리며 내어다 주는 충청도식 민물 매운탕을 받아 탄성을 내질렀으며, 마당을 가리키며 닭을 잡으라는 왕택이를 보며 곱게 눈을 흘기던 왕택이 처가 마치 마사이족 여인들처럼 닭을 잡으러 뛰어 다니는 품새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고, 농사가 대풍이라 기분이 좋다는 왕택이의 손을 잡고 서 마지기 논빼미에 만족하는 그의 삶이 성인의 그것처럼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대고...

그런데 잠시 후, 나이는 스물 대여섯이나 되었을까 하는 젊은이가 노란 유치원 가방을 등에 맨 아이 손을 잡고 들어오며 이렇게 얘기했다.

“아버지. 아무개 데리고 왔시유.” (아마 손을 잡고 들어온 아이의 이름 같은데 지금은 까먹었다.) 말하자면 결혼식 때 왕택이 처의 뱃속에 들어 있던 아이가 바로 그 젊은이였던 것이다.

이윽고 처음 나를 맞을 때처럼 맨발로 뛰어 내려가는 왕택이 왈

“아이구. 내 새끼. 유치원 갔다 왔남? 오늘은 뭘 배웠댜?”

그리고는 다음 순간 제 손자로 보이는 그 아이와 함께 내 쪽을 쳐다보는 왕택이가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대학교 댕긴 할아버지 친구여. 우리 아무개, 빨리 할아버지 허야지?”

그리고 나는 그 녀석에게 이런 말을 듣고야 말았다.

“하부지.... 안녕....”

아... 나이 마흔에 할아버지가 된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나를 할아버지로 만들어버린 내 친구 왕택이. 대학은커녕 중학교도 다 마치지 못했으나 적어도 이 집, 이 동네에서는 왕 중의 왕인 내 친구 왕택이... 왕택이가 커보였다.

20년이 다 되어 불쑥 찾아온 친구를 마치 어제 저녁 헤어진 친구 대하듯 스스럼없이 대하는 왕택이와 그 식솔들이 아름답다.

손바닥만한 논에서 가난을 대물림하면서도 대풍이라 자랑하며 가진 것을 나눠먹는 왕택이, 왕택이 처, 그리고 제 아비를 닮았을 것이 분명한 아들, 그리고 앞으로 이 나라를 조금은 맑게 만들 것이 분명한 내 손자(?)....


글쎄...

명박이하고 이건희는 이게 뭔 얘긴지 알기나 할까?
에라 기대도 하지 말자. 내게는 왕택이가 있지 않은가....
올 추석에는 왕택이네 집에 한 번 들러야겠다.
내 사랑하는 왕택이는 아직도 거기에서, 고치지 않은 집에, 이제 바야흐로 오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이름처럼 ‘왕’스럽게 살고 있다니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참으로 든든하다.

/변영국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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