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상봉

우리 집 둘째는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이 아이는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했다. 사실 요즘 아이들 중 유치원(어린이집 포함)을 졸업하지 않은 아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유치원을 나오지 못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 아이가 일곱 살 나던 그 해 겨울, 우리는 살던 곳에서 멀리 이사를 했기 때문이고, 길어야 3개월 정도 보내면 유치원 생활 끝인 것을, 새로운 곳을 찾아 적응시키느니 그냥 아무 곳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이가 다닐 유치원을 알아보는 것은 사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지나가던 말로 ‘난 반드시 초등학교는 졸업해야지’했다. 집집마다 사각모를 쓴 유치원 졸업사진이 걸려있는 상황인데 자신은 그렇지 않았으니, 어쩌면 ‘초등학교 졸업’이 아이에게 마땅하고 명명백백한 소원이었을지 모른다. 난 사실, 그때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별일 없는 한 당연히 졸업할 것을 소원이라니, 얼마나 재미있고 뜻밖인가. 물론 아이의 입장은 분명 달랐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이는, 작년 2월, 자기의 소원처럼 무사히,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들었다. 이제 중2가 된 아이에게 그 당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아이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면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 것이 아쉽냐고 했더니, ‘그거 뭐 중요한가?’ 하는 반응을 보였다. 고맙게도 말이다.

사실 지금에서야 이렇듯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사실상 유치원은 아이들의 첫 번째 학교인데, 믿을만한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을 정도로 유치원과 어린이집들은 많은데, ‘아, 이 유치원이야말로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겠구나!’ 하고 신뢰감을 주는 곳은 '가뭄에 콩 나듯' 할 정도로 찾기 어려웠다. 아이를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에 상담을 하다보면, 유아교육에 대한 철학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교사들도 많았고, 돈벌이에 급급한 곳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혹자는 성당 부설 유치원은 어떠냐고 권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맞다. 그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성당 부설 유치원은 좀 나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참 아쉽게도 그 곳 또한 여느 유치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성당 부설 유치원의 경우, 새로운 원장 수녀가 부임하고서는 경제 논리를 앞세워 10년이 넘게 일한 교사들을 모두 물갈이해 버렸다. 이유는, 10년이 넘은 교사는 우선 마음대로 일을 시키기도 어렵고, 임금도 많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도 그 교사들은 새로 부임한 원장 수녀에게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자신의 일터로 알아봐야 할 곳은 다른 성당 부설 유치원이거나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 등이 우선이었고, 그 까닭에 자신의 이력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교사들은 원장 수녀가 부임한 후 6개월 만에 모두 사직해야 했고, 뒤이어 20대 초반의 젊고 경험 없는, 그리고 저렴한(?) 임금과 질적으로 낮은(?) 인력이 투입되었다. (혹, 새로 유치원 교사가 된 분들은 기분 나빠하지 마시길. 이건 그분들을 폄하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시간과 경험이 가져다주는 한계와 임금에 대한 단순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 신입 교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선배 교사들의 경험 아닌가?)

요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제들이 최고경영자 마인드로 신자들의 관리에 치중하고 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어쩌면 위에 언급한 성당 유치원장 역시 경영자의 마인드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교사는 내 마음대로 부리는 직원이고 아이들은 한갓 소비자군, 그것도 아무 것도 판단할 줄 모르는 소비자로 말이다.

새로 부임한 유치원장이 10년 넘게 일한 근로자(교사)를 해고(권고사직이었다 하더라도)한 것은 조직과 자본의 횡포이며, 힘없고 소외받기 쉬운 어린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성당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에 대한 고민은 이 글의 본말이 아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적어도 아이들을 당당한 한 인격으로 생각한다면,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야 한다.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이들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할 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 유치원도 아닌 성당 유치원이, 경제 논리를 앞세워 교육 환경을 한꺼번에 바꿔버린 것은 아이들의 정서적 측면 등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막 한 인격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에게 ‘너는 소중한 사람이며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알려주고 모셔야 할 교회가, ‘너 또한 우리 유치원 경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교사의 자질과는 아랑곳없이 젊고 예쁜 사람들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유치원, 어린이집, 학원 등이 간혹 있는데, 혹시 성당 유치원도 이런 마케팅을 따라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여기에 비례해 내 아이를 어디다 맡길까 하는 부모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이제 우리 집 아이 중에 유치원생은 없다. 그래서 유아교육에 대해 예전처럼 체감지수가 높지는 않다. 그러나 이제 열 살인 우리 집 막내가 여섯 살이던 때 내게 남겨준 메시지는 우리 어른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확실하게 해 주었다.

“엄마,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
“응, 하느님한테로 가지.”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음, 그러면 다시 나한테로 오는 거네!”

그랬다. 아이 안에는 하느님이 계셨다. 그러니 죽어서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곧 다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아이는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하느님을 모신 아이들을, 우리 어른들은 한갓 경영을 위한 소비자로 보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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