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마리아(편의상 가명으로 씀)는 본당에서 홍보분과의 일을 책임지고 맡아 성실하게 봉사하고 있는 중년의 자매다. 그는 남들 다 쉬는 명절에도 본인에게 맡겨진 일을 말없이 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황당해 하며 전했다.

그는 그날도 다음 주에 나올 주보를 편집하고 있었다. 본당 주보에 공지해야 할 내용이 있었는데,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같은 지구(地區)내 성당이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리아는 이것을 혼자 판단하기보다 주임사제의 재가를 받고 싶었으나, 마침 주임사제는 잠시 해외 체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보 공지를 한 주 미룰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보좌신부에게라도 허락을 받아 주보에 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제관에 있는 보좌신부에게 전화를 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마리아는 보좌신부와 통화할 수 있었고, ‘중요한 안건인데 주임신부님도 안 계시니 보좌신부님이 한번 보시고 검토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서 내려갈 수가 없으니 전화상으로 그 내용을 읽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이 오십의 마리아는 삼십대의 젊은 보좌사제가 원하는 대로 1층 성당 사무실에서 4층 사제관으로 연결된 전화선을 통해 긴 글을 읽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보좌신부의 허락이 떨어졌고 홍보분과는 주보공지를 냈다. 그 보좌신부는 사제서품을 받은 지 2년을 막 넘겼고, 물론 그 성당은 그가 사제서품을 받고 첫 번째로 발령 받은 첫 임지였다.

사례2) 사목회 임원들이 회의를 마치고 헤어질 때였는데, 사목회장이 주임사제에게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총회장이 자신의 차가 주차장에 있다고 말했고, 주임사제는 자신이 '그래도 명색이 주임인데 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가야 되겠냐’고 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은발이 성성한 총회장은 차를 빼러 주차장으로 달려갔고, 총회장에게 막내동생뻘 쯤 되는 주임사제는 커피를 마시며 다른 신자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두 사람 만의 친밀함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례3) 고해 성사가 화해의 성사라고는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무겁고 어려운 성사이기도 하다. 어떤 신자가 하도 되는 것이 없고 괴로워서 철학관에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쟁이에게 점을 봐 보았자 뾰족한 것도 없었고, 신자로서 그곳을 찾아간 것도 영 개운치 않아 용기를 내어 고해소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사제는 신자의 고백을 듣고 신자의 마음을 헤아려 흔히 말하듯 그의 고통을 위로하거나 혹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권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격한 감정을 실어 “XX하고 있네”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일로 그 신자는 한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았고, 사제이동이 있고 나서 얼마 후 다시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교회공동체에서 ‘섬김’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자주 한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 ‘겸손한 마음’,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에 관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고 있다. 그래서 이제 좀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싶을 만큼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섬김과 겸손과 배려는 단지 구호에 그치는 건 아닌가 싶다.

위에서 예로 든 일들은 일부 성당, 일부 사제들에 지나지 않는 현상이기를 바란다. 일부러 혹은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라, 정말 잘 몰라서 그랬기를 바란다. 아니 꼭 그랬으면 좋겠다. 혹, 만약이라도 ‘내가 신분데...’ 하는 잘못된 권위의식으로 ‘성직자의 위상이나 위엄’을 과시하려 했다면, 아! 그런 일은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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