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행복하다, 후배들아!"

이번 공연처럼 연출로서 배우들을 괴롭힌 공연이 아마도 없었던 듯하다. 애당초 공연의 소재로 바벨탑을 선정한 것부터 다소 무리였던 것이, 성경을 봐도, 심지어 요세푸스의 역사서를 봐도 바벨탑에 관한 내용은 그저 몇 줄에 불과 했으며 그 몇 줄 역시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네들의 상식선을 과도하게 벗어나 있는 내용이었으니 그것으로 소위 ‘리얼리즘’연극을 한다는 것이 가당한 일이 아닌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아대는 이 시대 산업 역군들의 정서상 삼성 건설이 두바이에 ‘버즈두바이’를 건축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일지언정 ‘위태롭거나’ ‘말세를 재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연출로서의 내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고 조바심을 냈으며 사뭇 도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삼성도 짓는다는 그 바벨탑 이야기

(물론 지금은 그것 보다 더 높은 빌딩이 지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지만) 두바이에 건설되는 ‘버즈두바이’, 즉 두바이 탑은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바로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기업도 아닌 삼성이’ 건설하고 있고 유사 이래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건물은 바로 그 ‘높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삼성을 대표 선수로 하는 이 나라 국민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건물은 정말로 바벨탑을 닮아 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맹목성으로 ‘높은’ 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것을 자랑하기 바쁘다.


테제1

노아는 살아남았다. 다른 모든 이들의 죽음을 딛고......


테제2

노아의 아들의 아들 니므롯은 조부의 ‘살아남음’ 보다는 나머지 사람들의 ‘죽음’에 더 몸서리를 친다. 스스로 선택되었다는 사실 보다 스스로가 선택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했다는 사실을 더 크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반역의 탑을 만들고자 한다. ... 말하자면 방법이 틀렸다.


테제3

지금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반역이 뭔지, 살아남음과 죽음의 의미가 뭔지, 그 무엇보다도, 과연 자신이 선택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이제 그저 탑을 쌓는다. 드디어 방법이고 목적이고 없다. 등등등......


행복하다, 후배들아, 니들 땜에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제목이 ‘탑 바벨’이라고 붙여진 연극을 올리게 된 저간의 과정이 이러하다.

말하자면 나는 ‘이 시대는 무시무시한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얘기를 희곡으로 썼고 그것을 이번에 연극으로 올린다. 아마 내가 만든 그 연극을 본 수많은 사람들, 특히 가톨릭 신자 중에 별다른 배고픔을 느껴보지 못한 많은 분들의 질타가 예상된다. 허나 어쩌랴... 나는 그저 좋아 죽겠는걸...

우선은 대학로에서 근 10여년을 나와 함께 했던 후배 녀석들이 이미 잡혀 있던 촬영 스케줄이니 공연 스케줄이니 하는 것들을 접고 내 공연에 배우로 참여해 주는 것이 좋아 죽겠고, 개런티라고는 똑 제 후배들의 절반 밖에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뭐가 좋은지 해죽해죽 웃으며 알토란같은 시간들을 엮어 나가고 있는 것이 좋고, 나보다 더한 욕심으로 작품을 분석해 나가는 것이 마냥 좋다.

열악한 환경에서 별다른 스텝을 붙이지 못하니까 제 스스로 무대 장치며 조명을 다 하겠다고 나선 창수는 제가 맡은 배역이 주연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조명 바텐에 무려 6시간동안을 매달려 있었고, 여주인공 레나 역을 맡은 지예, 강한 여자 롯 역을 맡은 명옥이는 재봉틀에 매달려 의상 데코레이션을 하느라 꼬박 열 시간을 보냈다. 팀의 막내이지만 주인공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경석이는 선배들 심부름 하느라고 손이 다 얼얼하다고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녀석들이 바로 ‘내 작품’ 때문에 모였다. 아 나는 행복하다. 그 놈들이 나를 믿어주니 행복하고, 그 놈들이 아직 ‘돈’ 보다는 ‘의리’를 기꺼워하니 행복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대세라고 믿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구조의 막강한 구조틀을 내 사랑하는 그 놈들만은 여전히 역겨워 하니 행복하고, 그 무엇보다 50이 다 되어가는 이 퇴물 선배와 즐겁게 당구를 쳐주니 행복하다.

오늘, 음악을 만들어 온 수민이 녀석과 대화를 나눴다.
“형님, 연극... 죽이네요.”
“네놈이 뭘 안다고 너스레를 떨어 임마! 리허설 시간에 늦게 오기나 하는 녀석이 말이야...”
“늦든 말든 죽이는 거는 죽이는 거예요...”


캬... 기분 좋다.
빨리 이 원고를 마감하고 쐬주 한 잔 해야겠다.


/변영국 2008-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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