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4]

아침부터 푹푹 찐다. 내복을 벗을까?

울고 넘은 용서의 고개
2008년 4월 15일 우테르가Uterga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며 오늘 넘어갈 '용서의 고개'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어쩐지 울컥울컥, 제대로 터져나오지 못한 울음이 목에서 켁켁거렸다. 며칠 전부터 자꾸 누군가가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평화의 기도가 싫고 그 기도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면서 눈물부터 났다. 하기 싫다.

리엔이 곧 나를 따라잡았다. 어제 리엔과 부모님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행복해지고 인생의 승자가 되려면 그분들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잘 안된다고 했더니 리엔은 언젠가 내 영혼이 준비되면 저절로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오늘은 내가 리엔에게 물었다.

"너도 네 삶에서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있니?"

그러자 리엔은 내게 엊그제 사진에서 본 아랍 여인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리엔이 수첩 속에 넣어다니는 중년의 아랍 여인, 나는 멋도 모르고 엄마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내 파트너야."

평범한 백인 가정에서 자란 리엔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기가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불행해하는 게 가슴 아프다고 했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자신이 가장 용서하기 힘들다고 했다. 한참 동안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해줄 수 없었다.
그래, 리엔. 하지만 정말 큰 문제는 남자를 사랑하느냐 여자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어쩌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너는 대단한 걸 하고 있는 거야. 누군갈 사랑하고 있으니까.

까미노에 와서 날마다 느끼는 것이 바로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거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상처가 있다. 누군간 좀더 잘 견디는 것처럼 보이고 누군 좀 덜 그래보여 그렇지 사실 모두가 똑같았다. 리엔과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말없이 느릿느릿 걸어갔다. 언덕 위 하얀 풍차들이 한결 가까워 보일 때,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린 이미 소중한 순간을 함께 나눈 친구였다. 리엔은 나란히 서있는 우리 그림자를 카메라로 찍었다.

▲윙윙- 바람소리에 헉헉대는 숨소리가 묻힌다.


용서의 고개는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고갯길은 가파르고 진흙탕 속으로 발목이 쑥쑥 빠져 내려갔다. 가까스로 올라선 고개 위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풍차 근처에 앉아 한참동안 그 바람소리를 들었다.
'제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구부터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나는 조용히 여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림이 지루해 배낭에서 오카리나를 꺼내 불었다. 오카리나 소리는 바람소리와 참 많이 닮았다. 마음을 다해 부는 내 피리 소리가 하느님 귀에 가 닿기를 바랐다. 한 시간이나 오카리나를 불다가 이제 내려가야겠다 싶을 때 누군가 내 안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아니다. 나중에 알려주마.'

내려오는 비탈길에도 주먹만 한 자갈이 잔뜩 깔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다치기 십상이었다. 땡볕은 내려쬐는데 발은 너무 아파 질질 끌듯이 울면서 내려왔다. 용서의 고개는 용서 그 자체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올라가는 길도 내려오는 길도 아주아주 힘이 들었다.

식당을 겸한 알베르게로 들어오니 길에서 만났던 독일 사람들이 '아까 그 울고 가던 애 아니야?' 한다. 울고 들어왔는데 이제 웃는다. 씻었고 좀 쉬었고 뜸도 떴고, 밥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밥이 장정 두 사람 먹고 남을 정도로 많았는데 그걸 다 먹었다. 아침마다 영역 표시도 꼭 한다. 정말 병 주고 약 주는 길이다.

아침에 리엔과 걸으면서 내가 말했다.
“나는 평생 내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별 쓸모도 없다고 생각했어. 어제 내가 한 일들이 나한테도 놀라워.”
그 말에 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 넌 정말 쓸모 있어! 그리고 사람들은 너를 정말 좋아해!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
자꾸만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입에서 나온다. 나 이 기도 싫은데. 진짜로 이루어질까봐 무서운데.

늦은 저녁, 눈이 또롱또롱한 한국 여자아이가 수비리에서부터 11시간 동안 40km를 걸어와 밥을 먹고 있다. 내가 3일 걸려 온 거리를 하루 만에 온 게 장하고 대단했다. 하지만 트리니닷 데 아레의 천년 된 성당에 배인 오묘한 아름다움, 라라소아냐의 작고 맛있는 식당, 시수르 메노르의 푸른 정원과 연못 주변을 뛰노는 고양이들을 저 친구는 못봤겠구나. 뻬르돈 고개에 앉아 한 시간씩 바람 소리를 듣는 것도, 팜플로냐 공원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그래, 느리게 걷는 것이 나는 더 좋다. 할 수 있는 한 나는 더 느리게 걸으리라.

고갯마루 직전 어느 담벼락에 기대있는데 하루에 35km를 걷는다던 이탈리아 여자애가 물었다.
"혼자 왔니?"
그렇다고 했더니
"너도 나만큼이나 미쳤구나!"
"그러게 말이야."

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순례자 놀이
2008년 4월 16일 푸엔테라레이나Puente La Reina

밤새 철제 2층 침대가 삐걱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침대가 흔들리니 다들 불안한지 밤새 헛기침을 해댔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7km. 문득 중세의 성당 기사단이 지었다는 팔각 성당 에우나테에 들를까 싶다. 에우나테에 가면 한참을 돌아가는 셈이라 갈림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고민 끝에 가보기로 한다. 땅만 보고 걷다가 너무 많은 걸 놓치면 아까우니까.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저만치 성당이 손에 잡힐 듯했는데 걷다보니 눈앞이 어질거리면서 구토가 치민다. 땡볕 아래 한참을 쉬지 못한 때문인가보다.

▲나바라주의 자랑 에우나테 성당. 관광 포스터에 꼭 있다.

비틀비틀 가까스로 에우나테에 도착하니 초등학생들이 현장학습 와있다. 그렇잖아도 막 선생님이 멀리서 온 순례자들과 그들을 지켜주던 성당 기사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진짜로 멀리서 온 순례자가 휘청휘청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구경났다. 사방에서 플래쉬가 터졌다. 내 평생 이런 플래쉬 세례를 언제 또 받아본단 말인가. 이 학교 아이들 앨범 속에 내 사진 한 장씩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지친 순례자의 표본'으로.

에우나테 성모님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 싶더니 우리 절에서 본 관세음보살님하고 닮았다. 발그레한 볼에 신비로운 표정까지, 관세음보살이 여기까지 파견 나오셨나 싶다. 신기하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유리가 없던 시절이라 대리석을 얇게 갈아 창문에 끼운 것도 재미있었다.

▲성모님이랑 관세음보살님은 어쩌면 자매가 아닐까?

에우나테에서 잠깐 쉬고 다음 마을 오바노스로 넘어간다. 포도밭에서 일하던 농부 아저씨들이 동양인 순례자가 신기해 자꾸만 말을 건다. "스페인 말 못해요!"란 말을 스페인 말로 했더니 농부 아저씨들이 갸웃한다. '안녕!', '잘 가세요'와 함께 유일하게 공부해온 스페인말이 '스페인 말 못해요!'다.

오바노스는 왕비가 되기를 거부하고 수녀가 된 여동생을 홧김에 죽인 오빠가 참회하면서 평생 수도 생활을 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는 바보들이 많다.

오바노스 가는 길에 유채꽃이 한창이다. 내가 자란 거제도도 지금 유채꽃이 한창일 텐데. 유채꽃 향기를 코랑 가슴이랑 뱃속으로 깊이깊이 들이마시며 행복에 겨웠다.

오늘의 화두는 '무엇을 버릴까.'
배낭 무게를 좀 줄여야 하는데 옷을 버리자니 아침저녁으론 아직 춥고 비옷을 버리자니 비올 때가 염려되고 무엇을 버려야 좀 편해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속에서 당장 '걱정을 버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그러면 되겠구나.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걱정하지 말고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오늘은 까미노를 시작한 이래 두 발로 가장 많이 걸었다. 그동안은 트레킹폴을 거의 목발처럼 의지해 걷느라 '네 발'로 걸었다. 오늘은 트레킹폴에 좀 덜 의존하기로 하고 느려도 두 발로 걸으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어떤 면에선 걷는 게 훨씬 편했다. 두 발로 걸으니 팔도 덜 아프고 오히려 속도도 더 빨라졌다. 아, 이래서 인간이 두 발로 걷게 되었구나, 새삼스럽게 두 발로 걷는 게 고마워졌다. 날마다 이렇게 가면 점점 더 튼튼해지겠지? 기분이 좋다. 기대된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왕비님의 다리'란 뜻인데 어느 왕비가 지어준 아름다운 다리로 유명한 마을이다. 수퍼에 장을 보러 갔다가 어쩌다 보니 혼자 먹기 너무 많은 재료를 샀다. 마침 일본에서 온 마코토 아저씨에게 같이 먹자고 하니 일행이 있다고 한다. 결국 스페인 사람 알랭, 아일랜드 사람 프랭크, 프랑스 사람 쟝 삐에르와 소년 삐에르, 레네, 기, 한국 사람 순진까지 여덟이 한 식탁에 둘러앉았다. 사람들은 내 파스타가 정말 맛있다며 조리법을 궁금해했다. 내 파스타는 '그때그때 달라요' 조리법이라고 하니 저마다 자기만의 조리법 한 가지씩을 털어놓는다. 할아버지들이 만든 또르띠야와 샐러드, 빵과 와인이 곁들여진 근사한 식탁이었다.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한국 전쟁'이 대부분이었다. 프랭크 할아버지와 나는 남북 아일랜드와 남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왜 우리는 같은 형제들인데 서로 죽이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프랭크 할아버지는 아일랜드를 떠날 수밖에 없어 지금은 영국에 살고 있지만 당신 뿌리는 아일랜드라고 하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오카리나로 '대니보이'를 불어드렸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민요와 우리 동요가 비슷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우리에게 비슷한 아픔이 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든다. 나이와 국적을 떠난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꿈을 이야기하는,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식당에서 뜸을 뜨는데 할아버지들이 하나 둘 몰려든다. 동양식 치료법이라고 하니까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아버지들이 앞다투어 나도 떠달라고 하시는 바람에 줄을 세워야 했다. 알랭 할아버지 어깨에 뜸을 떠드리다 등에 난 털을 좀 태웠는데 다른 할아버지들이 호들갑스럽게 "알랭! 니 등이 불타고 있어! 니 등에 구멍났어!" 하고 알랭 할아버지를 놀려댔다.

프랭크 할아버지 말로는 까미노에 가져와선 안될 세 가지가 휴대전화, 책, 카메라란다. 때로 카메라가 없으면 걷는 데 훨씬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싶다가도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져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사진이 없네. 술 안마신다고 아무리 말해도 와인은 프랑스 우유라며 억지로 권하는 할아버지들 꼬임에 넘어간 탓이다. 아무래도 나는 까미노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다. 걸음은 느리지만, 순례자 놀이는 진짜로 잘하고 있는 것 같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