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에서 '아시아 교회의 리더십-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며' 심포지엄 열려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원장 김용해 신부) 주최로 지난 17일부터 ‘아시아 교회의 리더십- 故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며’라는 주제로 서강대학교 다산관 101호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심포지엄의 첫번째 순서로 오랫동안 김수환 추기경을 가까이서 보필했던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가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 내용이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고민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여기에 옮겨 싣는다. -편집자

▲강우일 주교가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사진/한상봉)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산 것은 내게는 복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학의 학술심포지엄 토론의 장에서 그분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제게는) 마음의 부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모나 형제-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몸이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저와 가까이 연결되어서 학술적 객관화하는 일은 어색하고 어렵고 참 망설여집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사회와 가톨릭교회가 살았던 격동의 21세기에 시대의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시달리다 가신 여러 선배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지나친 과장이나 미화를 하지 않고 그분을 알리는 게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일일 겁니다.

식민지 조국에서 울분과 불만을 지니고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에 출생하여, 그러니까 (조선의) 독립 전에 23년 동안 일제가 조선을 다스리는 상황에서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청년 김수환은 조국의 상황에 울분과 불만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억압당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배우고 살아가는 조선 민족의 굴욕과 부당함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동성고등학교에 다닐 때 ‘수신(修身)’이라고 지금의 윤리에 해당하는데, 그 시간에는 동서양 철학 사상을 배우거나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고 시험 문제도 그런 게 나오리라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천왕이 조선에 있는 학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게 문제였답니다.

고등학생 김수환은 반감이 솟구치면서 시험지 위에 이름을 쓰고는 “첫째,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둘째, 그러므로 소감이 없다”고 썼답니다. 그 일로 교장에게 불려가서 혼이 났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소년 김수환의 가슴에 분노가 자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그로서는 사회적 지위나 발언권이 없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체제의 불의나 민족의 불운에 적극 나설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사회 문제 정치 문제에 언급을 하지 않았고 만사에 순응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쳤습니다. 소년기의 김수환은 욕구불만으로 가득했으나 현실에 떠밀려 나갔습니다. 개인적으로 불굴의 투지나 이념으로 적극적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투사나 운동가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은 이제 신부가 되어라.” 어머니 한 말씀에 소신학교에 가..

김수환 소년이 소신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할 때 일입니다. 예과과정은 지금 초등학교 5학년에 해당하는데 사제 후보로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사제성소를 느꼈겠습니까? 김수환 소년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대구교구 사제서품식에 다녀와서 어린 김수환과 형 김동한에게 “너희들은 이제 신부가 되어라.” 그 한 마디에 소신학교를 갔습니다. 소신학교 시절에도 집이 그립고 엄마가 그리운 소년 김수환은 엄마한테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신학교에서 쫓겨나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돈을 두면 안 되는데 기숙사 자기 방 책상 위에 눈에 띄도록 돈을 두기도 했지만, 발각이 안 되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대신학교에서도 김수환 청년은 사제성소에 대한 확신이 없어 고민을 하다가 자퇴를 결심하고 학장을 찾아가 신학교를 나가겠다고 말을 했답니다. 학장신부는 한 마디로 “나가!” 그랬는데 “신학교에서 나갑니까?” 하니까 “내 방에서 나가!” 하여 고비를 넘겼습니다. 김수환 청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제라는 이상을 향해 달려가기보다는 떠밀려서 한 발짝씩 나아갔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즉위식에서, 김수환 추기경(1978.9.3)

일본 유학, 한국전쟁 등 파란 겪으며..

그러고는 대신학교 때 일본에 유학을 갑니다. 이것도 본인이 원한 게 아니고 시험을 쳐서 합격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주교가 불러서 “학장신부가 일본에 너를 보내라고 했다”고 하여 뜻하지 않게 등떠밀려 유학을 갑니다.

그러나 김수환은 유학생활에서 일본의 새로운 문화와 세계를 만납니다. 일본 상지대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적대감과 반감으로 바라보던 일본 사람과 일본 문화를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만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일본의 배울 점과 긍정적인 것을 알게 되고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 유학은 한 인간으로서 한 단계 도약하는,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양성기간이 되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조선 유학생에게도 학병동원령이 내립니다. 청년 김수환은 근원적인 회의 때문에 징집을 피하였으나 일본 당국은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관헌을 통해 압력을 가하고 친지를 통해서 나중에는 당시 일본인이던 대구교구장 주교를 통해서 강한 압력을 행사합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김수환 청년은 전쟁터에 떠밀려 갑니다. 전쟁터에서 청년 김수환은 새로운 체험을 합니다.

남방의 무도에서 미군과 직접 교전은 없었지만 전쟁터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하느님에 대한 미지근한 믿음이 확고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죽음의 코앞에서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뿌리를 다지게 됩니다.

얼마 뒤 김수환은 동족상잔의 6.25의 비극을 겪게 됩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북한의 성직자와 피난을 가다 납치된 성직자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이 시대에 사제로 산다는 게 생명을 담보로 수행하는 직무’임을 절감합니다. ‘이 시대 사제로 산다는 게 무언가’ 하는 새로운 소명의식과 무게를 느끼고 다집니다. 공산세계가 될지 자유세계가 될지, 이러한 위기가 전환이 되어 목숨으로 지켜야 하는 사제직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신앙을 다져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청년 김수환은 희미하고 미지근한 사제직에 대한 길에서 뚜렷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김수환 신부는 사제서품 뒤에 안동과 김천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라 경제가 절단 난 상황에서 초근목피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교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고민을 하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교우들과 동고동락을 하였습니다.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각별한 친교를 몸으로 체득하였던 것입니다. 신자들과의 동고동락을 통해 사목자의 기쁨과 보람에 젖어듭니다.

독일 유학가서 그리스도교 사회론 배우고..제2차 바티칸공의회 알아가..

그렇게 2년 동안의 본당생활을 마치고 독일 유학을 갑니다. 독일 유학은 일본 유학 때 만난 예수회 게페르트 신부가 주선한 것으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7년 동안 독일에 체류하면서 외적인 요인으로 공부를 마치지는 못하나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살아온 유럽의 문화적 유산을 풍부하게 접하면서 삽니다.

그때 로마에서는 요한 23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 개최하고 있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이 지난 2000년 동안 내려온 그리스도교 전통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논의를 하는 것을 흥분과 놀라움을 갖고 지켜보았습니다. 김수환 신부는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때쯤 귀국합니다. 대구로 돌아온 김수환 신부는 <가톨릭시보>에서 일을 하면서 공의회 이후 유럽의 새로운 교회상을 직접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공의회가 가르치는 교회상을 한국 교회에서 펼쳐가는 자리를 만들고자 힘을 씁니다. 이 시기는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비학습기간이 됩니다.

1966년에 주교로 서품되어 한국 주교단에 들어갔을 때 교회의 새로운 여정에 대해 김수환 주교만큼 깊이 숙고하고 갈망하던 이는 없었습니다. 1968년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의 첫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련의 소임 이동은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한 사이에 연타로 밀려드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측도 못했고 감당하기엔 벅찬 직책이고 직분이었으나 이 밀려오는 파도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이 새로운, 밀려오는 인생의 장에, 그 파도에 온몸이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지만 정신 차리고 그 자리에 있었고 발을 디디고 있었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 (명동성당. 1986.11.17)

용기 있는 사람이 없어..독재정권아래 민주화운동에 참여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3선 개헌을 하면서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할 때도, 1971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를 합법화하는 첫걸음을 뗄 때,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끝나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마음으로 그 사태를 직시하였습니다.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서 그건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아무도, 측근에 있는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그런 말을 하는 용기 있는 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그럴 만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의 축을 거꾸로 돌리면서 가려고 하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 나라도 나설 수밖에 없다는 비장한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1971년 성탄미사 때 대통령에 대한 바른 소리를 쏟아냅니다. 그 뒤 20년을 민주환 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을 적극 보호하며 연대하는 대열에 함께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정부 세력에 비판하는 데 앞장서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물결이 권력층이 이 나라와 백성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목자 추기경의 직함을 가지고 떠밀려서 발언을 합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주교단과 합의가 어려웠고, 서울교구 원로사제와 젊은 사제가 갈라지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정의가 세워지도록 기도하는 걸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로사제들과 교회가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투신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젊은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은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급속도로 이어지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 도시빈민을 위해서 옹호자가 없었기 때문에 떠밀려 그들 곁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떠올리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생각납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마치 우리와 비슷한 상황의 폴란드 추기경 카롤 보이티야는 나중에 교황이 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람됨의 스케일이 클 수 있었던 것은 나치 치하를 거쳐 공산 정부 치하에서 단련과정을 거치면서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일제 치하 6.25, 군사 독재 기간을 통해서 인간 김수환을 단련시키고 준비시킨 덕분에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인물이) 됩니다. 스스로 기획한 적이 없이 항상 떠밀려서 한 발자국씩 (발을) 내밉니다. 그분을 떠민 것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 구약의 예언자 요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김수환 부제가 사제서품 때 상본에 성경 말씀을 새기는데 시편 51편의 "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 가슴에는 시편 139편(최민순 번역)이 더욱 새겨졌다고 했습니다. 김수환이라는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드러내는 노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을 노래하며 오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말소리 내 혀 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앞뒤로 이 몸을 감싸 주시며, 내 위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나이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주시고, 어미의 복중에서 나를 엮어내셨으니
묘하게도 만들어진 이 몸이옵기, 하신 일들 묘하옵기, 당신 찬미하오니,
당신은 내 영혼도 완전히 아시나이다.
하느님 당신 생각은 알아듣기 힘드오며, 헤아릴 길 없을 만큼 많사오이다.
세어보자 하여도 모래보다 더욱 많고, 끝까지 닿는 데도 도로 당신이오이다.
주여, 나를 샅샅이 보시고, 내 마음을 살펴주소서.
나를 시험하시고 내 은밀한 생각들을 아시옵소서.
나쁜 길을 걸을세라 보아주시고 영원의 길을 따라 나를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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