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내 이름은 변영국이니 수주 변영로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을 듯 하여 족보를 내리 훑어봤던 기억이 있다. 그랬더니 정말 고맙게도 그 분은 나와 같은 항렬에 그 이름을 올려놓고 계셨다. 말하자면 그 분은 우리 집안의 ‘형님’인 셈이다. 물론 촌수를 어림하자면 대단히 고단하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귀하다는 ‘친일파가 아닌 예술가’를 배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분은 ‘명정 40년’이라는 배짱 두둑한 책을 남기셨다.

자기 스스로 술을 먹고 실수했던 실수담을 줄줄이 엮어낸 그런 식의 책을 만약 누군가가 오늘날 출판했다면 (일단 출판 자체가 불가하겠지만) 미친놈이거나 어떻게 해서든 이름을 좀 내 보고 싶은 잡스러운 인종 정도로 치부될 것이 분명하니 수주는 분명 선각이었다.

그 선각이 보고 싶다.

아무튼 각설하고... 그 명정 40년이라는 작은 문고판 책에 ‘백주에 소를 타고’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바, 이것이야말로 수주의 기행 중에서도 기행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촌수가 무지하게 먼 집안 형님. 몽매한 후배가 감히 형님의 그 기행을 한 번 반추해 보고자 합니다. 봐 주십시오)


1. 수주는 당당했다.

공초 오상순과 횡보 염상섭, 성재 이관구, 이렇게 삼 주선이 내방한즉...... 허나 나 역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였다.

- 아 본받을진저. 마누라한테 들킬까봐 ‘술 많이 안 마셔’라는 서글픈 거짓말을 늘어놓는 이 시대의 주 당들이여.


2. 수주는 돈을 쓸 줄 알았다. 그리고 두둑했다.

몇 자 적어 아이 하나를 불러다가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는데 내용인즉 ‘좋은 기고를 해 줄테니 50원을 미리 부쳐라’였고...

- 그립다. 오로지 술 한 잔의 풍류를 위해 한 달 치 월급을 선불로 요구하는 저 기풍이.. 그리고 갖고 싶다. 감히 제3의 권력을 넘어 제1의 권력으로 군림하려는 언론을 상대로 외상 거래를 트는 저 배짱을...


3. 그러나 수주는 소박했다

50원은 거금이라 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다 하여도 선술집에서는 도저히 소진할 수 없는 거금이요, 대낮부터 요정에 가 서둘다가는 안심 못할 액수이니.... 우리는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서 성균관 뒤의 사발 정 약수터로 가기로 하였다.

- 과연 그대들은 이해할 수 있겠는가? 50원은 술값이다. 그러면 마땅히 그 돈은 전부 술을 마시는데 ‘소진’해야 한다. 재테크가 어떻고 노후 대책이 어떻고 노심초사하는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새가슴들이여. 우리 모두 화들짝 놀라야 하지 않겠나. 아 로또나 사서 일주일을 버티는 앙상한 군상들이여.


4. 수주를 비롯한 4인은 모두 ‘비겁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기를 시작하였다..... 공초 선지식이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을 했으니... 우리 모두 옷을 찢어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본디 대자연과 인간을 이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니.....공초는 먼저 옷을 찢어 버렸다. 나머지 삼인도 천질이 그리 비겁치는 아니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 한 채로 소를 잡아타고 유유히...

- 백주 대낮에 음주 난행을 일삼은 이 일행을 단속하는 경찰(일본인 순사)들 과 이 일행이 벌인 실랑이를 떠올려본다. 그저 주어진 대로, 막연히, 정연한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찌든 얼굴로 빠가야로를 외쳤을 순사들을 어찌 감히 호탕하게 웃으며 잡을 테면 잡고 가둘 테면 가두라고 일갈을 휘날리는 우리의 선배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 가엾을 진저 .... 저 엄청난 정신세계와 강렬한 내공에 감히 맞장을 뜨려 했던 일본인 순사들이여..


이상이 ‘3.1 운동 당시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고,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온갖 넘치는 풍자와 재치로 그 시대를 농락하고 조국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주 눈물을 흘렸던 수주 변영로의 명정 40년을 읽은 나의 소감의 일부이다.

/변영국 200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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