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3]

▲안개가 자욱한 새벽길

통곡하며 걸은 새벽
2008년 4월 13일  트리니닷 데 아레Trinidad de Arre

독일 사람들 체력을 부러워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하면 보통 20km 남짓한 수비리에서 묵는데 기어코 5.5km 더 걸어서 라라소아냐까지 오는 건 독일인들이었다. 역시나 독하군, 그랬는데 알고보니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나 걸으러 나가는 것도 독일인들이다. 그들은 씩씩하게 걷고, 황소처럼 먹고, 코도 아주 우렁차게 골았다. 그래, 졌소. 당신들 성실한 것 인정!

부지런한 독일 사람들 덕분에 나도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해롤드가 알려준 대로 반창고로 발톱을 있는 힘껏 싸매니 통증이 좀 덜하다. 아침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 묘하다. 올해 일흔 둘이라는 프랑스 할아버지 부부가 뒤에서 "미스 코리아!"하고 부르시더니 "부엔 까미노!"하고 복을 빌어주신다. 이른 새벽길, 느릿느릿 손잡고 걷는 노부부가 참 사랑스럽다.

검은 민달팽이 한 마리가 길 위에 나와 있다. 문득 달팽이가 느리다거나 내가 빠르다는 건 진실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엔 자기만의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달팽아 너는 니 속도로, 나는 내 속도로 가자. 그럼 우린 잘 가는 거다!

라라소아냐엔 가게가 없고 그나마 하나 있는 식당도 아침엔 문을 열지 않아 빈속으로 새벽길을 나섰더니 금세 허기가 몰려왔다. 내 생전 이런 허기는 처음이었다. 발도 아픈데 배까지 고프니까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먹을 것을 만날 때까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이 상태로 못버틸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배고픔이 무섭다는 것을 난생 처음 느꼈다. 그런데 그때 내 속에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빵 한 조각 못먹고 이보다 먼 길을 물길러 다니는 어느 우간다 여자아이의 영상이었다. 나는 지금 스페인에 있고 우간다는 여기서 한참이나 먼데 뜬금없이 터져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 아이의 고통이 너무도 절절하게 와 닿았고 내 배고픔이 한없이 작게 느껴져 부끄러웠다. 속에서 북받치는 어떤 것이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배고픔 하나로 그토록 사무치는 울음이 나오다니 어리둥절했지만, 그렇게 나는 이른 아침 숲길을 통곡하며 걸어갔다.

오늘도 어제처럼 평지가 많아 힘든 대로 걸을 만했다. 아픈 발로 걷는 동안 오늘의 화두는 '통증'이었다. 기자영씨 책에 따르면 통증은 메시지다. 통증은 내가 지금 적합하지 못한 행동이나 자세를 하고 있거나, 혹은 그런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알아차리고 고치기로 하거나 고친 이후에는 더이상 작동할 필요가 없는 신호체계인 셈인데, 지금 나는 내 엄지발톱의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고 발톱이 어떻게 되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통증이 내게 더 알려주어야 할 뭔가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통증을 의식해서 절룩거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자 걷는 게 한결 편안해졌다. 난생 처음 발톱을 잃는 경험이 두렵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는데 그 순간 암으로 한쪽 다리와 골반을 잃어야 했던 기자영씨가 떠오르면서 용기가 났다. 오늘 나는 통증의 본질을 약간이나마 느낀 것 같다.

마더 데레사의 '매일의 기도'를 읊으며 오늘의 목적지 트리니닷 데 아레에 도착했다. 이곳 알베르게는 천 년 된 작은 성당을 지나서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작은 마을과 중세 성당의 분위기가 독특했다. 오늘은 주일이라 순례자 메뉴가 없다고 해서 이런저런 주전부리로 허기를 채웠다. 특히 멸치같은 작은 생선을 소금에 절여 올리브랑 같이 꼬치에 끼운 살딘이 아주 맛있었다. 뭔들 맛이 없었으랴!

어제 라라소아냐에서 만났던 미국인 친구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열네 살짜리 그리핀과 엄마 헤더, 인터넷 작가인 리엔. 헤더는 뉴욕에서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항상 일이 바빠 하나뿐인 아들은 비싼 유치원, 비싼 사립학교에 맡겨 키웠다. 하지만 정작 아이가 다 자라도록 함께한 추억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헤더는 일을 그만두었고, 그리핀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1년 동안 홈스쿨링을 하기로 하고 그 중 반년은 세계 여기저기를 여행 중이란다. 나는 두 사람의 용감한 결정을 축하해주었다.

리엔은 나처럼 파울로 코엘료를 좋아했는데 그건 파울로 코엘료가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젠가 코엘료가 자기 몸은 남성이지만 자기는 여성이라고 인터뷰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종종 나도 내가 남성적이라고 느낀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가지고 사람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외선 차단마스크. 한국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
세 친구는 내가 친구에게 선물받은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보고 기겁했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 박사 같다고 손사래를 치던 친구들에게 나는 이 마스크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동양 여성들의 고운 피부 비결은 이 마스크라고 뻥을 쳤다. 요즘 주근깨가 늘어 고민인 사춘기 소년 그리핀이 살짝 관심을 보이자 나는 마스크를 냅다 떠넘기고 달아났다. 이후로 그리핀은 종종 그 마스크를 써서 보는 내게 안도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내게도 쓸모가!
2008년 4월 14일 시수르메노르Cizur Menor

오늘은 도시를 지나는 길이다. 등교하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배낭 멘 순례자들이 간간이 보인다. 거리 구경, 사람 구경, 한참을 가다보니 어느 순간 화살표가 사라졌다.

흠…. 뛰어난 방향 감각을 동원해 손가락으로 찍어본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알아 맞춰 봅시다.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씩씩하게 전진하고 있는데 친절한 언니 두 명이 뒤따라오더니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라고 일러준다. 어제는 어떤 아저씨가 진통제를 주고 가더니(당장 먹으라며 내 배낭에서 물통까지 뽑아 손에 쥐어주었다.) 오늘 어떤 아저씨는 발목을 삔 거면 자기가 잡아줄 수 있다고 보여달라 한다. 사방에 친절이 넘쳐나는 곳이다.

도시는 길 찾기가 복잡해 화살표를 여러 번 놓쳐가며 팜플로냐에 들어섰다. 팜플로냐는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대도시인데 7월에 열리는 소몰이 축제가 유명하다고 한다. 며칠 내 인적 드문 산길만 다니다가 갑자기 사람도 차도 많은 도시를 만나니 좀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나는 관광객들에게 참 좋은 볼거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 온 단체 관광객 한 명이 나를 보고 "순례자다!" 하고 소리치자 다들 우르르 몰려들어 내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놀라고 당황해 서둘러 시내를 벗어났다.

팜플로냐 외곽 비내리는 어느 공원에서 빵이랑 요구르트로 아침 겸 점심을 때웠다. 오늘도 팜플로냐까지 오는 길에 배가 고팠다. 내가 이렇게 자주 배고픈 인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공원에서 허겁지겁 빵을 뜯어먹고 있는데 지나던 어느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다정한 스페인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나도 "올라!" 하고 인사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자 뭐라고 소리치시더니 내게 침을 탁 뱉었다. 말뜻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느낌에 "이 거지야, 저리 썩 꺼져!" 하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봐도 내 행색이 볼품없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시선과 말투에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다. 나는 거지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젖은 채로 공원에서 떨고 있었고, 허겁지겁 빵을 먹고 있었고, 집도 없었고, 가진 건 달랑 배낭 하나였다. 문득 나 역시 누군가를 이런 시선으로 본 적은 없었나, 돌이켜보게 되었다. 적어도 앞으로는 절대, 누군가를 이런 시선으로 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내 눈에 노숙자로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그는 분명 순례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바라 주립 대학을 지나 팜플로냐 시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니 시수르 메노르까지 2km 표지판! 어제까지만 해도 트레킹폴을 목발처럼 의지하고 걸었는데 오늘은 두 다리로 무게 중심을 조금 더 옮겨올 수 있었다. 어쩐지 오늘은 공짜로 온 것 같다.

▲팜플로냐 공원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그리핀과 헤더가 와있다. 곧 리엔도 도착했다. 그리핀과 헤더는 요 며칠 몸을 푸는 중이고 리엔은 무릎을 다쳐 조금씩만 걷고 있었다. 리엔과 수퍼에 먹을 것을 사러 갔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파스타를 만들어 친구들과 나눠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서툰 솜씨지만 면을 끓이고 소스를 볶아 파스타를 만들었다. 무턱대고 만들었더니 양이 많아 그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리엔은 발가락에 생긴 물집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책에서 읽은 물집 치료법이 기억났다. 마침 리엔한테 실하고 바늘이 있길래 내가 물집 치료법을 안다고 말했더니 리엔은 "그래?" 하면서 덥석 내 무릎에 발을 올려놓았다. 나는 그저 안다고 말했을 뿐인데 리엔은 나를 믿고 발을 맡기고 있었다. 나는 떨렸지만 용기를 냈다. 바늘로 물집을 뚫고 물기를 짜낸 후 실을 조금 남기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또 나는 마당에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틈에서 오카리나를 불었다. 사람들이 찔레꽃, 섬집아기 같은 우리 동요가 참 좋다고 했다. 밀양아리랑도 반응이 좋았다. 사람들은 내 피리 소리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고 노래 하나가 끝날 때마다 박수로 다음 곡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참 많은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스파게티를 만들어 여러 사람을 먹였고, 리엔의 물집을 치료했고, 오카리나를 불어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전에는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다. 내가 사람들을 먹이고, 상처를 치료하고, 즐겁게 하다니! 내가 이 모든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아무도 내가 이런 걸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 나를 믿어주었다. 나를 이리로 오게 하신 분이 나를 먹이고 치료하고 위로해주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나한테 그 일들을 시키고 계셨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귀찮게 왜 자꾸 눈은 뜨라 그래!
선생님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선생님은 그분 안에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분이 계신다는 걸 명심하라고 하셨다. 더 느리게, 감사하며 걸으라고도 하셨다. 시속 1km 보다 더 느리게 걷는 건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더 감사하며 걸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날마다 이 길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쟝이 뚜삐와 함께 왔다. 새라는 없었다. 새라의 안부를 물으니 아마 그녀는 지금 멀리까지 갔을 거라고 한다. 수비리에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늑장을 부리던 새라를 다정하게 기다려준 쟝이다. 대답하는 쟝의 표정에서 아픔과 슬픔이 느껴진다. 사람들 이목도 아랑곳 않고 다정함을 나누던 연인은, 이렇게 사흘 만에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순진 (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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