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8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에 따르면 지방의 한 국립의과대학에서 전공의들이 지도교수의 성매매 비용을 댄다고 허리가 휠 지경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수술이 있고 난 다음이면 당연히 단란주점에 전공의들과 함께 가서 놀고 난 다음 혼자서 2차(성매매)를 가면서도 그 비용을 모두 제자들에게 전가하였다고 한다.

지방에 출장을 가서도 성매매를 하면서 그 비용을 전공의들에게 전가하였으며, 20만원에 불과한 주사제를 환자들에게 기백만원을 받고 강매하였으며 그 비용을 걷는 것도 역시 제자들에게 시켰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교수는 자신이 그 분야의 가장 좋은 실력자이기 때문에 결코 잘릴 염려가 없으며 잘려봤자 다른 데서 모셔갈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고 오히려 큰소리라고 한다.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반도덕적 보수주의

이 사람의 사례와 말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가 가진 결정적인 도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가족의 가치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이들이 동성애나 낙태, 여성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역시 8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한 목사가 오바마 대통령이 죽어서 지옥에 가기를 기도한다고 말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오바마가 낙태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하느님도 오바마를 미워한다고 확신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위 의과대학 교수의 경우에도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혐오와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명박 대통령이 물의를 일으켰던 발언이라던가 성폭력을 저지른 교사들에 대한 낮은 징계, 국회의원들의 잦은 성희롱성 발언에도 둔감하기 짝이 없는 현실등은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가정을 지키는 것을 가장 신성시하면서 성장해 온 ‘사회적 보수주의’ 혹은 ‘도덕적 신자유주의’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반도덕적 보수주의에 더 가까운 편이다. 돈이 되고 장사가 되는 한 그 개인의 윤리적 문제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뻔뻔하게 주장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것이 한국의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보수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수주의에서 윤리와 도덕을 빼고 나면 그들의 정당성의 근거에는 무엇이 남는 것인가?

그들은 왜 동성애와 낙태 문제에 과도하게 반응하는가?

원래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고 국가의 개입을 혐오하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상이었다. 총기는 말할 것도 없고 포르노 등에 대한 규제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에 개입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런데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개입이 철회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몇 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동성애와 낙태의 문제이다.

얼핏 생각하면 성정체성이나 낙태 역시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너그러워야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가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성장하는 동안 가장 강력하게 결합한 것이 바로 극우 개신교 근본주의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사상의 결합에서 접착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이 가족이다. 국가의 개입에는 반대하지만 개인의 ‘도덕적 타락’에 반대하기 위해서 이들이 내세우게 된 근거가 ‘가족’이며 이 ‘가족’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개인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는 것이 앵글로 색슨식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클린턴 스캔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국가의 개입을 저지하고 가부장의 주권을 강력하게 하며 가족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절대화하여 결국은 모든 사회적 책무를 개인에게 지우는 것(즉 개인의 도덕화)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즈..동성애..그리고 터무니 없이 비싼 약값

이것이 동성애와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과 공격의 가장 큰 무기였다. 특히 미국에서 신보수주의가 등장할 무렵 ‘우연하게도’ HIV/AIDS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에이즈가 게이돌림병으로 불리우게 된 것도 그것이 그들의 무분별한 성적 방종에 의해서 확산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천벌이라는 의식이 강하였다. 동성애와 여성운동에 대한 이런 공격에 대해 동성애 커뮤니티와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반동적 성찰의 흐름이 나타났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뉴욕타임즈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한 앤드류 슐리반과 같은 경우이다.

그는 자신이 HIV 양성반응자임을 고백하면서 에이즈의 확산이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쉽게 말해서 이전까지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질줄 아는 그런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그저 즐기기나하는 어린애에 불과하였다고 질책하며 동성애자 내부 커뮤니티를 향하여 ‘성장하라’고 거듭 촉구한다. 그러면서 그는 에이즈 약값이 너무 비싸다는 항의에 대해서도 유아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에이즈와 관련된 70%이상의 연구는 기업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성장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언제까지 어린이들처럼 칭얼거리기만 할 것이냐고 타박을 놓으며 그가 내놓은 해답은 바로 ‘성장하라’는 말이다.

성숙한 동성애자의 공헌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더글라스 클림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역시 오랫동안 에이즈와 관련된 활동을 해 온 동성애 활동가로서 슐리반의 ‘성장하라’는 구호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 중의 하나는 미국에서 에이즈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것을 전국가적인 이슈로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성애자들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을 때 HIV/AIDS가 동성애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은 ‘성장하지 못한’ 이성애자들이 아니라 ‘성장한’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 같이 생활을 영위하던 동성애자들이 사망해갈 때 그들을 돌보고 협력적으로 대처하며 공동체를 이룬 것도 역시 동성애자들이다. 사람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 이것보다 더 성숙하고 공동체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다.

진보적인 성정치 운동은 지나치게 방어적이다

이 둘의 논쟁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진보적인 성정치 운동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비난에 대한 대처법이 지나치게 방어적이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의 방종한 성생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우리가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지.’라는 반동적 수용이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그것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라는 식의 옹색한 반박이다. 그들의 도덕 패러다임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 안에서는 승산이 없다. 오히려 이 안에서 우리는 계속 찌질되면서 방어적으로 항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의 논쟁에서 클림프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의 의미를 누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하는 점이야말로 진정한 전투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하는 도덕과 반도덕, 윤리와 반윤리, 성숙과 미성숙의 대립전선에서 고군분투할 것이 아니라 그 도덕과 반도덕, 성숙과 비성숙의 대립전선을 우리가 그어야한다는 것이다.

'절제, 믿음, 안되면 콘돔’이라고..

이를 통해 우리가 드러내야하는 것은 도덕의 폐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도덕의 패륜성이다. 이것은 이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에서 에이즈 원조와 관련된 정책 전반을 맡고 있었던 토바이어스는 ‘절제, 믿음, 안되면 콘돔’이라는 유명한 정책을 펼친 인간이다. 즉 될 수 있는 한 섹스를 하지 말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한 사람하고만 할 것이며, 그래도 정 안되면 콘돔을 사용하라는 것이 이 정책의 핵심이다.

이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토바이어스는 몇몇 특정한 교회단체나 보수적 단체들에게만 지원을 약속하고 해당 국가에도 이 원칙을 적용할 것을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토바이어스가 몇 년 전 워싱턴을 뒤흔들었던 고급매매춘의 포주의 고객 장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 결국 사임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명박의 발언이라던가, 여배우들에 대한 성접대 강요 등등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끊이지 않는 추문들도 사실은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가족 자체가 이미 반가족적이다

도덕을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는 패륜적일 것이다. 마치 이것은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족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맞다. 우리가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가족이다. 단 부르주아적 가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족을 반대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가족 자체가 이미 반가족적이라는 점을 꼬집은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즉 부르주아적 가족 내부에는 가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성립할 수 없으며, 그 안에는 온갖 기만과 거짓, 그리고 착취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도덕적 신자유주의의 폐륜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지적을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도덕 안에는 도덕이 없다. 그 안에는 폐륜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성정치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적 도덕은 폐륜으로서 거부되어야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수용해야하는 성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같은 선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하는 것은 성정치적 의제들의 신자유주의화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자 소비의 문제로 돌려버린 신자유주의적 삶의 양식은 이미 동성애자들, 특히 남성동성애자들에게는 너무 익숙하다.

해방은 시공간적으로 게토화되어 그 안에서 마음껏 즐기면서 서로서로를 소비한다. 이런 점을 이미 간파한 싱가폴은 나라가 앞장서서 ‘국가수립일’에 게이파티를 열어주고 있다. 우스운 것은 이 나라에는 아직까지 소도미법이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사회적 주체로는 인정해줄 수 없지만 시장적/소비적 주체로서의 동성애자, 특히 돈 많고 자손이 없어서 돈을 물려줄 필요도 없으며, 시장에서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친밀성과 ‘스타일’을 살 수 있는-들을 대환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동성애자들이 저항적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은 싱가폴의 이런 정책을 환영하며 즐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슐리반의 ‘성장하라’는 요구는 동성애자들의 무분별한 반도덕적 행위들에 붙여야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라’는 구호로 전환되어야할 것이다.

 ‘솥뚜껑 운전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전문적 직업인’이 되어 체제 안에 들어온 여성

여성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서 가장 잘 꼬집은 논문이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성매매하는 십대여성들의 삶을 다룬 민가영의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주부주체들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해 다룬 박혜경의 논문이다. 아래는 내 책에서도 소개한 이 두 논문의 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지금까지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여성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정치적 요구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체제가 도입되면서 주부는 더 이상 ‘솥뚜껑 운전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전문적 직업인’으로 적극적으로 사회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운동을 통해 정치적 요구가 달성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의해 체제내로 포섭이 되어버린 셈이다.

주부, 가정의 경영자요 편의 감정치료사이며, 자녀들의 생애 기획자이며 가족 금융관리사

신자유주의에서 주부는 가정의 경영자로 적극적으로 평가된다. 주부는 남편의 감정치료사이며, 자녀들의 생애 기획을 맡은 매니저이며, 가족의 금융을 굴리는 금융관리사이다. 이에 따라 가족 자체가 경영의 대상이 되며 하나의 작은 기업처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최대화하는 단위이다. 이런 작은 기업의 CEO가 바로 가정 주부인 셈이다.

이러면서 벌어진 가장 아이러니한 일은 중산층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주부가 하던 일이던 가사노동 중에서 여성이 하기 싫은 청소나 식사 준비와 같은 것은 파출부들에게 맡겨졌다는 점이다. 대신 주부들은 보다 더 ‘전문적인 일’인 자녀 교육 지원과 재테크, 재산 증식에 몰두한다. 여기에 본문에서 등장하는 아이의 사회적 관계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학업 전반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주부는 이제 가사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신자유주의화한 ‘전업주부’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일제로 일을 하며 가사노동까지 떠맡아야하는 ‘여성노동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에 의해 재편된 ‘전업 주부’는 과거에 여성운동이 해방을 부르짖던 그 ‘전업 주부’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며 여성운동의 위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층의 아이들, 몸을 팔아야..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에 하층의 아이들이 어떻게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현재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상품가치가 있는 몸을 팔며 살아가는가를 잘 그린 글은 민가영의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논문인 ‘신자유주의 시대 신빈곤층 십대 여성의 주체에 대한 연구’이다. 아쉽게도 이 논문 역시 아직 책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 민가영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아이들이 어떻게 비유예의 문화에 빠져들게 되는지를 그림처럼 잘 그리고 있다.

중산층들의 학력자본을 쌓는 학교는 기본적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는 훈육과 규율의 공간이다. 그러나 저소득층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리 자기들이 개겨봤자 자신들에게 돌아올 자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 한국의 교육은 계층이동 가능성을 상실하였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을 거부한다.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소득층의 가족들은 보살핌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오히려 그 공간에서는 양부나 주변사람들에 의한 성폭력이 빈번한 위험한 공간이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위험하고 따분해진 공간 대신에 아이들은 자기의 눈앞에서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펼쳐지는 삶을 선호하게 된다.

학교와 가족을 떠난 아이들에게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친구와 언니들로 엮여진 관계망이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끊임없이 연결되는 관계망이 이들의 세계이다. 아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사방에 널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것이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무시할 수 있는 잠정적 힘’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 관계망을 통한 이들의 이동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확장가능하다. 이 망속에서 누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이들의 다음 행보는 달라진다. 삶의 다음 다음 순간은 전적으로 우연에 열려있지만 이 아이들의 적응력 역시 대단히 높다.

이 이탈과 적응의 과정에서 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몸이 즉각적인 자본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돈으로 바꾸며 살아간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몸을 팔아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들은 스스로를 소비적 주체로 형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학교와 가정 밖으로 내쳐진 아이들이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학습하고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몸도 팔릴만한 몸과 팔리지 않는 몸으로 나뉘며 팔릴 수 없는 못난 몸을 가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 그리고 배제는 그 개인의 탓이 되어버린다. 다시 한번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마저도 승리를 구가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방하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우리가 걱정해야하는 것은 사회적 보수주의와 결합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공격받는 성정치가 아니라 그 신자유주의화하고 있는 성정치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방하고 있는가를 문제삼아야한다.

한편에서는 우리를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부도덕적 존재로 몰아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양식 전부를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성을 기반으로 사람들에게 겨누고 있는 양날의 칼이다. 우리를 특정한 생활양식으로 몰아 넣고는 그 방식을 도덕적으로 질타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해방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생활양식과 도덕(혹은 폐륜), 그 양쪽 모두에서 탈출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는 그 이중의 덫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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