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전례 상 이즈음은 사순시기이다. ‘사순’ 하면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올려 지는 것이 ‘십자가의 길’ 일 것이다. 미사 전․후, 우리들은 성당을 돌며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많은 신자들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여럿이 함께, 때로는 홀로 걷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통의 길을.

‘십자가의 길’은 영어로 ‘The Stations of the Cross, Way of the Cross, Way of Sorrows’라고 하고, 간단히 ‘The Way’, 라틴어로 ‘Via Crucis; Via Dolorosa’라고 부른다.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십자가의 길을 오늘날처럼 14처로 고정하면서 교구 직권자(교구장 주교나 또는 교구장에게서 위임을 받은 책임자, 예컨대 총대리)의 허가를 얻어 합당한 방법으로 세운 14처가 있는 성당이나 경당, 순례지 등지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필자 주]

예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고통의 길을 걸었던 예수, 그 예수의 발자취를 걷기를 원했다. 그들의 의지는 성지에 대한 순례로 옮겨졌다. 성지에서 그들의 모험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돌아온 순례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오랫동안 기억하길 원했다.

때때로 그들은 성지에 대한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고 성지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만들었다. 이제 예루살렘의 성지를 유럽으로 옮겨왔다. 물리적인 그 길을 실제 밟을 수는 없었지만 그 신심만은 유럽 안에 재현하고 기념할 수 있었다. 그러한 신심으로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위한 마지막 여정의 장면들을 제작했다. 그러나 17세기까지 교회 벽에 걸린 십자가의 길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림과 조각으로 만들어진 일련의 세트들은 교회에 의해 제한되었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의 못 박힘’, ‘피에타’ 등의 개별적 주제로 알고 있는 작품들이 일종의 성화로서 교회 안에 존재했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세트가 생겼지만 이렇게 모여진 각각의 처(station, 잠시 머물러 있는 곳)들은 5개에서 30개가 넘는 것까지 다양했고 성골이나 나무십자가로 제작되었을 뿐 역시 지금의 이미지가 들어간 모습은 아니었다. 1731년 클레멘트 12세는 14개로 십자가의 길 각 처의 주제를 정하였다. 이들 중 8개는 복음서 속에서 그리고 6개는 초기 전승으로부터 나온 것을 기념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것은 부활사건을 첨가하면서 15개 처가 되기도 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상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묵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 이미지들이 디지털 영상으로 올라와 있고 그것을 묵상할 글까지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형상과 이미지가 첨가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던 1910년대만 하더라도, ‘십자가의 길’ 이라는 작업을 한 사람의 작가가 다루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표현은 실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교의를 해치지 않으면서 신자들이 명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만 하는 부담스런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에릭 길의 십자가의 길

이 글에선 20세기초, 정확히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에릭 길(Eric Gill, 1882-1940, 영국 조각가, 활자디자이너, 돌 세공사, 판화가, 저술가)’이라는 작가가 제작한 십자가의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에는 에릭 길이 제작한 십자가의 길이 있다. 그런데 정작 런던에 가면 '웨스트민스터'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두 개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 우리가 흔히 웨스트민스터 성당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이다. ‘Westminster Abbey’라고도 하고 ‘수도원 중의 수도원’이라는 의미로 정관사 ‘The’가 붙은 ‘The Abbey’로도 불린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르기까지 영국 국왕 대부분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또한 이곳에 묻혀있다. 에릭 길의 십자가의 길이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Roman Catholic Church)’은 영국 가톨릭교회의 중심 성당으로 왕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다.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걸어서 5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있다.

 

 

이 성당은 건축가 존 프란시스 벤틀리에 의해 비잔틴 교회 건축양식으로 축조되었고 1903년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후 벤틀리의 죽음과 경제적인 이유로 내부의 인테리어는 시작도 되지 못 한 채로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에 있던 십자가의 길도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뿐 이었다.(도3) 이런 와중에 에릭 길은 웨스트민스터 교회 당국으로부터 의뢰를 받았으며 그의 십자가의 길은 1918년 성 금요일에 축성되었다. 
 

1913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후에 그의 인생에서 이 십자가의 길을 제작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자 기회였는지를 고백했다.

길의 입장에서 십자가의 길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직은 미완성의 건축물, 그리고 장식하지 않은 성당의 특징들, 인테리어를 위해 14개의 부조패널들을 떠맡았을 때 그가 이 세트들을 어떻게 다루려고 했을까? 그는 14개 십자가의 길의 각처들을 성당의 장식이 아니라 비품(furniture), 꼭 필요한 어떤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이 작품들을 다루는 방식이 음악에 있어서 “단선률(plaint chant) 성가”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로 조각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부조들은 바닥으로부터 약 9피트위에 조각의 하부 가장자리가 놓여졌다. 보는 이의 눈높이 보다 꽤 높게 위치했다. 모든 기도처들은 68인치의 정사각형으로 된 돌로 조각되었다. 각 패널은 대부분 저부조로 조각되었고 여백은 그대로 두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라틴어 명문으로 채워졌다. 등장인물들과 십자가가 아니면 따로 부조를 장식하기 위한 것들은 되도록 자제되었다. 
 

1처 예수 사형선고 받으심 

진리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대답했다: 그의 피는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바라부스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예수를 채찍질했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넘겨주었다.
 

로마 총독은 비록 놓은 자리에 앉아 이 선고에 죄가 없음을 상징하며 손을 씻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손이 묶인 죄인으로 서 있으나 높은 권좌의 총독과 대등하게 서 있다.

2처 예수 십자가를 받아들으심

십자가를 받아드는 예수와 로마 군인들 사이로 돋아난 잎 장식들이 보인다. 비록 예수의 이 여정은 고통과 슬픔, 절망으로 끝나는 길처럼 보이지만 그 너머 희망이 있다.

3처 예수 첫 번째 넘어지심

예수의 쓰러짐은 비록 한 사람의 로마 군인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지만 앞에서 잘려진 채 보이는 창과 당겨진 허리끈은 예수의 앞에서 그를 재촉하고 고통주고 있는 이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4처 예수 어머니를 만나심 

부인들 중에서 당신은 복되도다.
무릎 꿇은 그의 어머니에게 예수는 축복을 하고 있다.
 


5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가 십자가 지는 것을 도와줌

역시 앞에서 예수의 허리띠를 잡아당기고 그것을 뒤에서 구경하는 두 사람이 있다. 이 5처는 십자가의 길을 의뢰 받기 위해 에릭 길이 시범패널로 제작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 내용은 처음보다 바뀌었지만 십자가의 길 구도와 작업방식을 대표적으로 알게 하는 패널이다.

6처 예수님과 베로니카

예수의 뒤에서 십자가를 들어주는 시몬, 예수의 앞에서 그의 얼굴을 닦아주기 위해 다가오는 베로니카. 고통의 길에서 그는 외롭지 않다.

7처 예수님 두 번째 넘어지심 

예수는 또 넘어졌지만 그의 손으로 자신의 몸을 버티며 이 고통을 다시금 굳건하게 받아들인다.

8처 예수님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심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마라; 당신들 자신과 당신의 딸들을 위해 울어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아기를 낳아보지 못하고 젖을 빨려 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 라고 말할 때가 이제 올 것이다.

무릎 꿇고 손 모은 여인들에게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했듯이 축복을 보낸다. 라틴어 경문은 그들에게 보내는 예수의 메시지로 새겨졌다. 이 장면은 에릭 길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치체스터(Chichester)의 성당에 있는 중세 조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9처 예수님 세 번째 넘어지심

나를 고소한 듯이 보지 마라. 나의 적들아 비록 내가 쓰러졌지만 나는 일어설 것이고 비록 내가 어둠 속에 있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다.

작가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이 같은 행위를 위한 표현을 세 번씩(첫 번째 넘어지심, 두 번째 넘어지심, 세 번째 넘어지심) 반복해야 했다. 같은 등장인물을 매번 다르게, 그것도 강도를 달리하며 표현하는 작업은 가장 예민하고 다루기 힘든 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에릭 길의 작업 속에서 가장 나중에 제작된 작품이다. 매번 예수의 고개는 쓰러질 때 마다 더 깊이 숙여지고 몸을 지지하는 오른손은 더 많이 구부려졌다. 의지로 육체적 고통을 지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정신적 신념마저 육체적 고통에 굴복할 때, 예수의 고통은 비감해 진다. 그리고 그것을 묵상하는 이들에게 예수의 고통은 인간적인 동질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10처 예수 옷 벗김을 당하심 

그들은 나의 옷을 나누었고 나의 옷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다.

수직으로 서 있는 예수를 중심으로 양옆에 쓰여 있는 라틴어는 마치 수평의 또 다른 십자가를 이루듯이 새겨져 있다. 제비뽑기를 위한 주사위 두개가 오른쪽 끝에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11처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들은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를 못 박기 위해 망치를 든 사람과 움직이는 예수를 붙잡는 남자, 못에 박히는 고통으로 목이 뒤로 젖혀지고 그의 오른손은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느라 힘이 들어가 있다. 이 장면은 명확하게 고통을 주는 자와 당하는 자 사이에 있는 예수의 좌표를 읽게 한다.
 

12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예수는 말했다. 끝났다.

예수의 마지막 대사는 위에, 그리고 그의 피는 성작을 든 천사의 모습에서 그의 제사인 미사 전례로 온전히 옮겨진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축복하는 손으로 우리에게 인사한다. 그의 죽음 후 지상에 남겨진 라틴어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그의 죽음은 우리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그를 보았고 거기에는 우리가 그에게 바라던 멋진 모습은 없었다. 그리고 실상 우리의 고통을 그가 스스로 받았다.


13처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로부터 내려오고 어머니의 가슴에 놓이심 

늘어진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때 이제 끝난 것이 아님을 땅 위에 새순들은 말한다. 다시 시작이다...

14처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묻히심

그의 시신을 옮기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아가는 여인은 담담히 손을 모아 기도한다. 그리고 죽은 예수는 명확하게 그의 상처를 보여주며 손으로 마지막 축복의 사인을 보낸다. 여기서 라틴어의 문구들은 마치 그의 비문처럼 새겨졌다.

시간이 다다랐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드러낼 때.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만약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씨로 남아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죽으면 그것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반면에 그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언제고, 온전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형상을 통해 전해오는 명상과 함께 또 다른 순례를 떠나실 수 있기를 빕니다.

/최정선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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