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 따라 배우기-5 :세상에 대한 해석과 발언-'가톨릭일꾼' 신문 ]

교회의 발언은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Vatican 공의회의 소집을 선포했을 때 세계는 놀랐다.  1962년 10월 11일, 역사적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을 벗어나 현대에 적응한다는 목표로 의식의 변화를 호소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 머리말에서 “공의회는 누구를 향해서 말하는가?”하고 스스로 자문(自問)한다.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발언이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밝힌다. 이는 교회가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제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뿐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며,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이에게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공의회는 인간의 세계를, 곧 인류 가족 전체와 인간이 살아가는 온갖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에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2항).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신앙을 증거하고 해명하는 동시에, 세상의 문제에 대하여 인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면서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줄 과제를 갖게 된다고 공의회는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로부터 교회가 받은 구원의 빛을 인류에게 제공함으로써 인류 가족 전체에 대한 연대성과 존경과 사랑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겠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하겠다”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교회의 깊은 관심과 형제애적 참여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발언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교회가 예전처럼 현세적 야심 때문이 아니라, 다만 교회는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리를 증거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구원하며, 봉사를 받기 보다는 봉사하러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3항).

세상 속 발언, 가톨릭일꾼 신문

▲반전운동에 나선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8쪽짜리 가톨릭일꾼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이 신문은 1933년 5월 1일에 2천 5백부가 유니언 광장에서 공산주의 집회 때에 뿌려졌는데, 교계신문처럼 신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어떠한 시민이나 노동자든지 이 신문을 읽고 세상 속에서 요청되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이해하고 복음적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가톨릭 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신문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불어났으며, 그 지역의 신학교와 교회에서도 수십 부씩 주문했다. 열성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가 신문을 팔았다. 독자들은 다른 종교, 정치 계통의 신문에서 볼 수 없는, 특별히 가깝고 가정적인 느낌의 가톨릭일꾼 신문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원칙이 있고 뉴스도 있었지만, 친구끼리 편지라도 교환하듯이 느낌을 준 글도 있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신문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특정한 동네 그리고 지역의 냄새와 소리와 작은 사건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되어

도로시 데이는 1952년 4월 가톨릭일꾼 신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만드는 세계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특별히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의 ‘작은 길의 영성’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데레사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작은 행동이 지닌 의미! 우리가 실행하지 못한 작은 것들의 의미! 우리가 하지 못한 항의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준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명을 선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형제애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 소수인들,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불의에 저항하여 외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통에 대항하여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일이 없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말해야 하고 써야 한다”고 천명한다.

▲'가톨릭일꾼' 로고
피터 모린이 처음에 제안한 신문의 이름은 가톨릭 본질주의자였다. 겉치레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뿌리까지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편집자의 태도를 나타내기보다 독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톨릭일꾼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신앙을 당시의 사회문제와 결부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유사한 성향의 공동협조자로 보기엔 힘들다. 피터와 도로시는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사람이었다. 피터의 뿌리는 땅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피터는 중세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그러나 그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도로시는 도시 출신으로 노동조합, 대단위 정치운동, 계급투쟁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다. 두 사람을 삶과 일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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