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걸음, 산티아고 가는 길-2]

▲누가 신발을 버리고 갔다. 나도 배낭이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

멋진 여행, 멋진 인생! (Nice journey, nice life!)
-2008년 4월 8일 생장피드포르St.Jean Pied de Port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까지도 오늘 순례길을 떠나야 할지 어떨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날은 아직 추웠고, 나는 아직 겁이 났다. 어젯밤 후배들이 떠나고 조용한 파리를 하루 쯤 더 느껴보고도 싶었는데 왠지 내 안에서 떠나면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눈을 뜨면서 급히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매사에 머뭇대고 주저하던 내가 이상하게 이번 여행만큼은 굉장히 즉흥적이다. 이게 바로 '직관'이라고 믿어보기로 한다.

숙소에서 나온 시각이 생장행 열차 출발 1시간 전. 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기차역으로 간다. 몽빠르나스역 가는 길도 한참을 헤매다가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랐다. 바욘이란 곳까지는 고속열차(TGV)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생장피드포르까지는 일반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바욘으로 오는 길에 보르도 지방의 끝없는 포도밭을 보고 감탄했다. 역시 프랑스는 농업국가구나. 어쩌면 프랑스의 여유는 먹거리를 다른 데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데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생장으로 가는 창밖으로 끝없는 초원과 강줄기가 흐른다. 양떼들이 풀을 뜯는 모습과 수선화가 가득한 들판은 꿈에서나 본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어느 간이역 앞에서 빨래 널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드니 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어쩐지 평화와 기적의 길 까미노로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함께 내린 순례자들. 자전거를 타고 온 순례자도 보인다

 

▲순례자 사무소 쪽에서 내려다본 골목
 
▲식당 앞에 있는 마네킨도 순례자
 

 

 

 

 

 

 

 

 

 

 

 

까미노 프랑스길(Camino Francess)이 시작되는 마을 생장피드포르에 내리니 오후 4시 15분. 나 말고도 일곱 명 쯤 되는 순례자들이 내렸다. 순례자 사무소로 가는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자끄'라는 할아버지가 아주 친절하게 크레덴시알(순례자용 여권)도 만들어주고 오늘밤에 묵을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도 예약해준다. 다리가 불편해 30km 가까운 피레네를 하루에 넘을 수가 없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물으니 다음 마을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택시 서비스를 신청해주셨다. 자끄 할아버지는 내 배낭을 숙소까지 옮겨주시고 가이드북 파는 서점에까지 데려다주셨다. 느리게 절룩대는 내 걸음에 보조를 맞춰 걸어주신 할아버지께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면 나는 언제나 뒤처져 걸어왔다.
"자끄, 할아버진 내가 이 길에서 만난 첫 번째 하느님이에요!"
나는 할아버지께 서울에서 가져온 책갈피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내 다리는 나아질 거라며, 포기하지 말고 시도해보라고 하셨다. 인터넷을 쓰고 싶으면 순례자 사무소로 오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내 첫 번째 하느님, 자끄 할아버지
▲전망대 돌틈 사이로 자라난 덩굴


 

 

 

 

 

 

 

 

 

 

이곳은 생장에서 제일 높은 곳, 성당 전망대다. 자끄 할아버지 말씀으론 한국인 두 명이 더 와있다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다. 지금 시각 6시 45분. 여기도 해가 길다. 날씨는 파리보다 따뜻한 것 같다. 벌써 내 몸에서 순례자의 땀냄새가 난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나는 긴장감에 소화가 안될 것 같아 초콜릿으로 저녁을 때웠다. 파리에서 만난 유학생 친구가 비상식량으로 쓰라며 준 초콜릿이다. 생전 처음 보는 내게 귀한 초콜릿을 선뜻 내어준 그 마음이 상냥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홉 시쯤 되니 사람들이 하나둘 방으로 들어오는데 아뿔싸, 나 빼고 다섯 명 전부 아저씨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온 아저씨들은 내가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듯 내 앞에서 바지를 척척 내리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자끄 할아버지가 내 방을 맞게 배정해준 건가? 놀란 건 나뿐인 듯하다.

신라 금관 책갈피를 선물받은 자끄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순례자 사무소를 나서는 내 등 뒤에 소리치셨다.
"멋진 여행, 멋진 인생!"


미쳤지, 이런 델 오고 싶어 하다니!
- 2008년 4월 9일 비스까레따Bizkarreta

다섯 명 아저씨들의 우렁찬 돌림노래 덕분에 잠을 설쳤다. 말귀는 어두운데 잠귀는 밝기도 하다. 밤새 한숨만 쉬다 새벽녘에 살풋 선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충주에 사시는 선생님이 손수 운전을 해서 생장까지 오셨다. 나는 길 떠나는 게 무서워 계속 움츠리고 있었다. 게다가 생장을 벗어나는 성문 밖에 나를 노리는 강도가 둘이나 있었다. 나는 못하겠다고, 강도가 나를 해칠 거라고 울먹였다. 선생님은 가만히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지켜만 보셨다.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게 옳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잠에서 깼다.

약속한 8시 30분이 되었는데도 론세스바예스까지 픽업해주기로 한 차가 안온다. 아마 그 꿈은 내가 걸어서 피레네를 넘을 거란 꿈이었나보다. 어제 밤새 소프라노로 코를 골던 아저씨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잘 잤느냐고 묻는다. 나는 뾰로통하게 잘 못잤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침을 먹는 동안 이야기해보니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밤새 고달팠던 건 난데 내가 되레 미안해졌다.

픽업차가 조금 늦었다. 오늘 손님은 자전거를 타고 온 호주 아저씨하고 나. 모두가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넘는 1900m 고갯길을 택시로 수월하게 넘어간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도장을 받았다. 걸어와서 받은 도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권에 도장이 두 개 생겼다. 여기서 묵을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이르다. 도장을 찍어주신 호스피탈레라(자원봉사자) 할머니도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 하신다. 그래, 좋다!

▲피레네에서 바라본 하늘

▲론세스바예스 성당
 

 

 

 

 

 

 

 

 

 

 

▲790km, 전혀 가늠도 안되는 거리!>

▲산티아고 가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석

 

 

 

 

 

 

 

가볍고 힘찬 기분으로 호젓한 숲길을 따라 나섰다. 헛둘! 헛둘! 구령을 붙여가며 트레킹폴에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전날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어있는 숲길은 걷기에 그만이었다. 나는 까미노에게 내 소개를 했다. 나는 누구고 어디서 왔으니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하늘과 땅과 숲과 나무와 돌과 달팽이 모두에게 드렸다.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산티아고는커녕 다음 마을까지도 못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까미노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날 때마다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나무 덤불을 헤치고 나갈 때는 나무에게 양해를 구했다. 

작은 마을이 나타나 점심을 먹고 그 다음 마을까지만 가려 했는데 걷다보니 별 생각 없이 마을 간판을 지나쳤다. 책이랑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그림 같은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가며 노란 화살표를 따라 신나게 걸었다. 잠을 거의 못잤는데 어쩐 일로 몸상태도 좋았고 트레킹폴 덕분에 왼 무릎 삐걱대던 것도 풀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미친듯이 불고 그러다 해가 나서 덥고, 날씨가 희한했다. 마치 시간의 문을 열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와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가는데 몸에서 무리하지 말라는 신호가 왔다. 다음 마을 비스까레따까진 한참 남았고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 거리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데 길도 완전 진창에, 소똥, 말똥, 양똥, 온갖 똥들의 향연이었다. 이제 보니 책이랑 다큐멘터리는 가기 편하고 예쁜 길만 찍어놓은 거였다.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빗길이 험해 트레킹폴 없이 걷기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계곡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굴러 떨어졌지만 다행히 물이 많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폭우 속에서 나는 산 속에 고립되었다. 내가 이 산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내가 겪고 있는 일의 심각성에 비해 내 마음은 지극히 고요했다. 두렵거나 떨리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길에서 더러 죽기도 한다는데 내 무덤이 나란히 생길 것 같은 날이었다.

 
비스까레따 가는 길 2.7km를 남겨두고 난 그냥 젖은 길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오늘 순례자라곤 쏜살같이 나를 지나쳐간 단 한 명, 사람 구경할 수가 없다. 나는 내 몸에게 사과하며 기분 내킨다고 막 걸어온 것을 후회했다. 순례 첫날, 몰골은 몇 년 떠돌아다닌 사람 같다.

빌어먹을 화살표는 똑같은 길, 어차피 만나지는 길인데도 꼭 험한 길만 골라 가리켰다. 몇 번 속고 나니 약이 바짝 올랐다. 나한테 보이는 이 화살표는 나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힘든 길만 가리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 화살표만 이렇게 힘든 길을 가리키는 거야? 다른 사람들 화살표는 이것보다 편한 길 아냐? 결국 나는 화살표에게 역정을 내며 “너 따위 거 필요 없어!” 큰소리 치곤 찻길로 나와버렸다. 화살표 따위 없어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구! 찻길을 따라 다음 마을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걷고 있는데 슬슬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잃었다.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이려니, 무턱대고 찻길을 따라갔는데 가보니 아니었다. 문득 겁이 났다. 길 위에서 해가 저물 것 같았다. 나는 허둥지둥 다시 표지를 찾았다.

▲도로 위에 친절한 조가비 그림. 병주고 약준다
가까스로 어느 길가에서 화살표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마치 돌아온 탕아가 된 기분이었다. 큰소리 치고 떠났다가, 두 시간도 채 안돼 울면서 돌아온 거다. 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신호들을 놓치고, 무시하고 살까. 그래놓고 급해지면 그제야 하느님, 부처님, 할머니를 찾는다. 순례 첫날, 나는 나라는 인간의 바닥을 본 것 같았다. 몹시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누가 알까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투덜대며 화살표를 버리고 떠날 때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한테 보이는 화살표 따위는 없어지고 내가 봐야 하는 화살표만 남았다. 애초부터 다른 화살표 따윈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게 보이는 화살표와 길을 알려주는 모든 표지가 너무나 고마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고마움이 가득 찼다. 어쩌면 나는 이것을 배우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화살표를 다시 만나 안심했지만 이번엔 표지판이 12km 다음 마을을 가리켰다. 이 밤에, 시속 1km로 걷는 내가 12km를 더 갈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찻길로 나가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다행히 냉장고 수리공의 트럭을 얻어타고 비스까레따까지 올 수 있었다. 홀딱 젖은 생쥐 꼴로 마을에 있는 호스텔에 짐을 풀고는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내가 미쳤지, 이런 델 오고 싶어 하다니, 땅을 치며 후회했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다. 생전 배낭 메고 걸어본 적 없는 험한 산길을 11km나 왔다. 장한 내 다리!
하지만 너무 힘들고 외롭다. 다 그만두고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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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며, 어린이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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